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그리뜨 Apr 07. 2020

아가씨! 결혼했어요?

featuring. 미국 휴스턴 영사관 

코로나 19로 인한 공포가 극에 달한 지금 이 시국의 미국. 매일같이 신기록의 실업률을 갱신하고 있는 와중 나의 영주권 절차는 진행 중에 있는데 집으로 메일이 도착했다. "증거 부족으로 서류 검토가 중단되었으니 빠른 시일 내에 증거자료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멍청한 나를 원망하다 변호사와 주고받았던 메일을 좀 뒤져보니 그녀는 기본 출생증명서를 언급했을 뿐 나에게 가족 관계 증명서를 내야 한다고 말해준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내 신청서였으니 내가 더 잘 챙겼어야 했는데. 하지만 내가 나를 원망하는 것은 마음적으로 힘든 일이니 적당히 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웬만하면 외출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오늘이 그런 경우다. 내가 영주권을 신청하기 위해 휴스턴을 왔구나 하는 마음과 휴스턴을 살아서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인가를 생각한다. 내가 달라스나 어스틴에 있었다면 휴스턴에 있는 영사관에 가기 위해 몇 시간이고 운전을 했어야 할 일이었다. 하필이면 영사관이 있는 대도시에 살고 있는 것이었다. 왕복 1시간이면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다. 


휴스턴 영사관. 나는 분명 전 남자친구와 이 곳에 와 본 적이 있었다. 18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어스틴에서 편도 2시간을 넘게 운전하고 와서 부재자 투표를 했던 곳이다. 하지만 건물은 낯설었고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빌딩에 맘대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빌딩 앞에 도착해서 영사관으로 전화를 하면 공무원 분이 친히 빌딩 문 앞으로 나오셔서 내가 열이 있는지 없는지를 체크한 후 나를 영사관으로 데려가 주셨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영사관은 협소했다. 


기본 증명서의 번역본 공증이 필요했다(온 김에 가족 관계 증명서도 번역본 공증을 받기로 하긴 했다). 여기서 웃기는 건 인터넷 상 공인인증서로 가족 관계 증명서는 영문으로 출력이 가능한데, 기본!!!!! 출생!!! 증명서는 한국어로만 뽑을 수 있다는 점이다. 철밥통 공무원들이란.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대목이다. 상식적으로 가족 관계 증명서 보다 야는 기본 출생증명서가 더 많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서류일 텐데 말이다. 열불 내며 나와 같은 절차를 밟고 있는 오빠에게 전화를 했는데 오빠가 말하길, "우리도 일을 해봐서 알잖아. 1은 하고 2는 안 하는 거야. 그냥 대충 하는 거지". 공감 +100이다. 공무원님들께서 이 점 시정해주셨으면 좋겠다. 


또 하나 웃기는 점은 번역을 신청자 본인이 직접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어로 본인이 직접 이름을 치고, 주민 번호를 치고, 본관이 어디니 하는 주소를 치고, 전산상으로 이 모든 서류를 열람하게 해 주신 전산정보 중앙관리소 전산운영 책임관 변혜경 님의 이름도 직접 쓴다. 써서 영문으로 프린트해가면 공무원님이 이거 고쳐와라 저거 고쳐와라 하신다. 그러면 몇 번의 수정을 거쳐서 번역 공증본이 완성이 되고 영사관 도장을 땅 땅 찍어주신다. 


내가 처리하고자 하는 서류가 가족관계 증명서라 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서류를 처리해주시던 엄마뻘 되시는 공무원님이 내게 물었다. "아가씨! 결혼했어요?" 어떻게 들으면 정말 기분 나쁠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지만 오늘따라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분 께서는 나에게 이거 고쳐라 저거 고쳐라 하면서도 나를 계속 아가씨라고 부르셨는데 기분이 꽤 좋았다. 나를 아가씨라고 불러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오히려 스패니쉬 버전인 세뇨리따를 더 많이 듣는 것 같다). 아가씨라는 단어 자체의 뉘앙스도 "예쁨, 젊음"이 묻어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타인에게 아가씨라는 소리를 들은 건 엘에이 한인 마켓 생선 코너였다. 당시 생선 코너에서 일하고 계신 분께서 회사 마치고 생선을 사가는 나에게 그 똑같은 질문을 했었다. "아가씨! 결혼했어요?" 그 아저씨께서는 교포 2세인 당신 막내아들의 사진까지 나에게 들이대시며 결혼 생각이 없냐고 물으셨다. 첫째 딸, 둘째 딸은 모두 하얀 미국인과 결혼해서 며느리만큼은 꼭 한국말하는 한국 여자이길 바란다며 아들이 얼마나 귀엽고 돈을 잘 버는 정유회사를 다닌다고 자랑을 하셨었다. 생각해보니 그 아드님이 당시 휴스턴에 있었던 것 같다. 외모가 별로 내 스타일이 아니어서 웃고 넘겼지만. 당신께선 꿈은 이루셨는지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미국의 정육점을 소개합니다 - 홀푸드의 정육 코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