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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집사 Lawjibsa Mar 08. 2016

냄비 안의 개구리

냄비 안의 개구리는 냄비의 물이 뜨거워지는 줄도 모르고 물의 뜨거움을 그냥 견디다가  

죽게 된다고 한다.

변화를 애써 외면하고 현실에 안주하면 결국 아무것도 못한다는 뜻이다.


연애나 창업이나 비슷한 면이 있다.

초기의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은 투신이 필요하다.

절벽의 아래는 안개가 짙어 보이지 않고, 절벽 아래에 대하여 알려진 것도 없다.

한마디로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최 어떠한 위험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어떠한 희생도 없이 비범한 일을 이룰 수 있을까? 


지금 당신이 처한 상황이 주변에서 보기에 안정적일 수 있다. 철밥통이라고 주로 이야기하는 

공무원일 수도 있고, 집안에 돈이 많아 아무런 일을 하지 않더라도 사는데 지장이 없을 수도 있다.  

당신의 상황이 안정적이라고 하는 것은 외부적인 평가일 뿐 당신을 반영하지는 못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인생을 회고해 볼 때 지금이 아름답고 멋있었다고 자평할 수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위험을 선호하는 인간형이니, 위험을 싫어하는 인간형이니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것이다. 


세상 만물은 모두 변하는 데 자신만이 변하기 싫어한다는 것은 의식이 성장하지 않은 것이다.  

돌이켜보면 20살 때의 현실인식과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과 40을 넘은 지금의 현실인식,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오히려 퇴보하지 않았나 생각될 때도 있다. 

하지만 젊었을 적엔 아직 몰랐다. 시간의 소중함을, 한 인생이란 바로 지금이 쌓여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겉으로 아는 것에 불과했다.  


이렇게 새벽에 갑자기 깰 정도로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책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잠이 깨는 40대를 위해, 즉 나를 위해 쓰는 글이다. 

40이 되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은 투신을 하기에는 주위의 가족들, 집 대출금, 학자금, 건강 등이 신경 쓰이는 가장들을 위한 책이다. 

삶에 대한 투신이란 냄비 안의 개구리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당장 자신이 젊었을 적 원했던 일을 꿈이라고 포장하여 직장을 사직하고 그 일을 하라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은 내 몫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는 그 사실, 자신이 아무리 변하기 싫다고 하더라도 시간은 흘러간다는 그 의미를 명확하게 인식하여야 한다. 

그러한 인식이 단순한 앎이 아닌 깨달음이 될 때 자연스럽게 변화를 모색하게 될 것이다.  

변화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자신을 성찰하는 것과 순환 관계에 있다. 자신의 욕망, 꿈, 인생의 목표를 생각해야 변화의 방향을 잡게 되는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변화란 당장 내일, 아니 1시간 이후부터의 자신의 삶을 어제, 그제, 전달, 작년과 다르게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이고, 남의 지시에 따라 행하는 시간을 줄이고, 자신의 시간을 늘려가는 여정의 시작인 것이다.  


오늘 결심하고, 내일 아침부터 나는 어제의 나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제의 나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면 눈빛이 달라진다. 무의미했던 행동에 의미가 생겨난다. 

행동은 아무 지도도 없이 방황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인생지도에 따라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첫 발걸음이다.  

옛사람들은 '일신우일신'이라는 말을 했다. 매일 매일 조금씩 변하는 것은 싹이 나고 꽃봉오리가 맺혔다가 꽃이 피는 것과도 같다. 

매일 매일 눈으로 계속해서 지켜보아도 꽃이 피려고 한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꽃이 피고, 우리는 우리의 지성으로 봄이 오면 오래지 않아 꽃이 핀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주변에서는 잘 모를 수 있다. 변화를 알아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의식 있는, 방향성 있는 행동이 쌓이면 어느 순간 확실한 변화가 온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냄비에 물을 올려놓고 불을 피우면 불이 꺼지지 않는 이상 어느 순간 물이 끓게 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확고한 사실로 인식한다.

인간도 다르지 않다.

불을 피우고 불이 꺼지지 않는 이상 지속적으로 열을 가하면 한 개인에게도 질적인 변화가 온다는 것 역시 자연법칙과 같은 과학적 법칙이다. 


어떤 것에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매일매일의 전진이 필요하고, 이러한 전진이 지속되면 꽃이 핀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어떤 꽃이 되는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알고 있다고 말하지 마라. 내일 아침 어제와 다른 행동을 하기 전에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고, 자신의 인생 목표에 대한 매일매일의 성찰과 그러한 인생 성찰로 가다듬어진 인생지도가 없다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기준으로는 아는 것이 아니다.  


하룻저녁의 고민으로 자신이 삶에서 무엇을 할지 알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이 별세계의 고민인 것은 아니다. 어느 대학에 들어가서 어떤 직업을 가질지, 어떠한 배우자를 만날 것인지. 돈은 어떻게 벌 것인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런 고민도 모두 인생지도와 관련된 고민들이고 현실적이고 중요한 고민들이다.  

그러한 고민들을 풀어가는 방법, 인생지도를 만드는 방법에 대하여는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다. 

그래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누구나 시간을 들여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사람들 개개인에 대한 맞춤형 방법이 없기 때문에 쉽게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이지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인류의 역사가, 종교가, 예술이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루소가 쓴 책 에밀에서 보듯이 예전의 교육방법은 훌륭한 스승을 초빙해서 같이 지내는 것이었다. 라틴어, 외국어도  배우고 펜싱, 승마도 배웠지만 그냥 같이 지내면서 모든 것을 배우도록, 생각하는 방식을 배우라고 했었다. 맞춤형 교육이었다. 


이러한 교육이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은 자명하다. 산업화가 되면서 사회에서 어느 수준이 된 근로자가 대량 필요하게 되면서 공교육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지금의 공교육의 탄생은 사실 산업화로 인한 직업인의 양성을 위한 것이다.

교육의 본질은 사실 변하지 않았다. 직업인을 위한 교육뿐 아니라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산업화 사회가 저물고 다시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한 많은 일들이 자동화되고 있고, 컴퓨터에서 정답을 찾을 수 있는 질문은 이제 질문이라고 하기 어려운 시대가 오고 있다. 특이점을 지나고 있다. 


주어지는 일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고 창의적이 될 때 인간은 보다 고차원적인 행복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행복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받는 그러한 행복과는 또 다른 행복감이다. 스스로 성장하고 있고, 다른 사람의 행복에 기여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에서 오는 행복감이다. 


모든 즐거운 일에는 길거나 짧거나 어느 정도 숙달을 위한 지루하고 괴로운 시기가 있는 것 같다. 이미 익숙한 일을 버리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데에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인간의 뇌는 이러한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하는 일은 회피하려는 성향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하루하루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고차원적인 욕구 또한 있다. 의미라는 것은 현상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다. 어떠한 일을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자율성은 사라지고, 자율성이 사라지면 행복의 원천이 말라간다. 


자율성을 획득하는 일은 냄비안의 개구리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 먹으면, 마음에 하나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이다. 하루하루의 자신의 일, 행동, 생각에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된다. 그러면서 그 씨앗은 자라서 싹을 틔우고 새로운 설렘이 다가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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