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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Dec 20. 2019

습작

백서른세번째

 ‘──님을 디바이스에서 완전히 삭제하시겠습니까?’


 나는 “확인”버튼을 눌렀다. 몇 초 걸리지도 않았다. 


머잖아 너와 관련된 모든 기록이 삭제됐다. 우리가 만나 헤어지기까지의 흔적 모두가 3초도 안 돼서 전부 사라졌다. 내가 네게, 네가 내게 마음을 주고, 퍼붓고, 지치고, 꺾이고, 깎아내고, 덜어내고, 게워내고, 버리는데 걸린 5년간의 과정이 터무니없을 만큼 허무하게 지워져버렸다. 


 정말이지 나는 지난 몇 년간 모바일 클라우드 기술이니 인공지능을 이용한 안면인식이나 하는 것들이 그렇게나 발전했을 줄은 몰랐다. 하나의 인터넷 계정으로 통합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계정이며 블로그와 저장공간 구석에 처박아뒀던 커플앱에 이르기까지 ‘확인’ 버튼 하나를 누르는 것으로 모조리 컨트롤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연하지.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수화기 너머의 친구가 말했다. “동영상이고 사진이고 걔 관련한 건 싹 다 삭제됐을 걸. 안면인식 그거 최근데 정확도 장난 아니야. 네 여친…… 아니 전 여친분이 몇 년 동안 얼굴 변화가 크게 있었던 것도 아니라며?”


 “맞아. 바뀐 게 없지” 나는 힘없이 말했다. 정말 그랬다. 겉으로 봤을 때 민경이는 바뀐 게 거의 없었다. 어깨 죽지까지 늘어트린 생머리가 여전히 눈부셨고, 뚜렷한 이목구비부터 목덜미로 내려가는 곡선이 아름다웠다. 바뀐 것이라곤 서로에 대한 마음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면 한 번쯤 단발을 시도해볼 법도 했다. 새내기 시절부터 몇 년 동안이나 되는 연애를 이어가다보면 더욱이 그렇다. 그럼에도 민경이는 늘 긴 머리만 하고 다녔다.


 언젠가 나는“너만큼 긴 생머리 잘 어울리기도 힘들지”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서 그 가늘고 빽빽하고 부드러운 머릿결이라는 게 각고의 노력으로 겨우 유지될 수 있었다는 건 먼 나중이 돼서야 알았다. 


 ‘정말 하나도 없다고?’


 친구와의 통화내용은 반신반의에서 확신으로 변해갔다. 삼만 장이 넘었던 사진첩은 수천 장으로 쪼그라 들었고, 동영상은 거의 남아있질 않았다. 연락처는 물론 카톡 친구 목록에도 민경이가 없었다. 혹시나 해서 ‘차단된 친구’ 목록을 조회했지만 마찬가지였다. 


 페북이나 인스타에서도 사정은 똑같았다. 서로 바쁘게 태그했던 게시물도, 웃고 떠들었던 댓글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소름이 돋아 하루 온종일 등줄기가 싸늘했다. 그런 와중에 ‘필름카메라로도 사진 찍어보는 건 어때?’ 하던 민경이의 목소리와, 거기에 ‘휴대폰이 있는데 뭐 하러 쓸데없는 짓을 해’ 했던 무심한 답변이 울려 머리가 아팠다.



 <고객이 전화를 받지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며…>



 한편 민경이는 내 번호를 완전히 차단한 것 같았다. 나는 이제 어떤 방식으로도 민경이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얼마 전에 이사갔다는 집주소도, 주위 사람들의 전화번호도 나는 몰랐다. 미리 알아놓을 걸 하는 후회조차 한심스러웠다. 불과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 사이에 나는 완전히 다른 상황에 처한, 완전히 다른 인격의 존재가 된 것 같았다.


 함께 찍었던 사진 한 장 남지 않았다. 뒤늦게 껍데기만 남은 사진첩을 몇 시간 동안 뒤졌다. 그래봤자 기계니까. 찾아보면 대여섯 장쯤은 남아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실로 오산이었다. 인공지능의 안면인식은 이제 인간의 판단력보다 날카로워 졌다. 데이트 당시 찍었던 사진이나 평소 주고받았던 셀카, 거기에 소위 말하는 엽사까지 가리지 않고 모조리 삭제해놓았다. 내 이십 몇 년 남짓한 인생 속에 그런 인물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오히려 잘못된 건 언제라도 널 떠올릴 수 있는 내 추억들이라는 듯이.



 “그래도 한 장은 건졌네” 친구는 소주병을 내 잔 쪽으로 들이밀었다. 


 “글쎄, 이걸 건졌다고 해야 하나……” 나는 잔을 내미는 동시에 말끝을 흐려버렸다. 꼭 사진 속 민경이의 모습 같았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기억할 수 있는 게 어디야? 어디 한 번 봐봐” 친구가 잔을 부딪으며 말했다.


 나는 가득 채운 소주잔을 쭉 들이켰다. 그리고 휴대폰 사진첩을 열어, <즐겨찾는 사진> 폴더의 맨 위에 있던 그 이미지를 띄워 보였다. 


 “뭐야 이게” 친구는 미간을 푹 찡그렸다. “너무 멀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잖아”


 “그러니까 같이 삭제가 안 됐겠지. 아마도 배경으로 인식한 거 아닐까” 나는 휴대폰 화면을 거둬들였다. 멋쩍은 마음에 눈썹도 들어올렸다. 


 “그게 민경씨가 맞긴 한 거야? 확실해?”


 “응” 나는 염치없이 대답했다. “어떻게 확실하지 않겠어”


 “무슨 소리야?”


 “거기서 처음 만났단 말이야. 스무살 첫 학기 때……”


 “그래?” 친구는 심드렁하게 소주를 마시고 말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동안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아있던 움직임을 멈추고, 남아있는 모든 정신력을 그 사진─그 흐릿한 민경이의 모습─을 쳐다보는데 쏟아 부었다.


 돌연히 시간이 멈췄다. 둘 만의 추억이 난생 처음 마주친 그 날, 그 돌계단 앞에서 오랫동안 멈춰있었다. 캠퍼스 가장자리를 수놓았던 그 등나무 가로수길, 가득히 채우던 연보라색 꽃잎들까지 못내 흐드러지다 말았다. 이별의 시작이었다.



<등나무의 꽃말>, 2019. 12



<등나무의 꽃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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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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