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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Apr 16. 2020

습작

백쉰두번째

 “형은 대체 하는 일이 뭐에요?” 중학생 남자애는 왼팔과 옆구리 사이에 농구공을 낀 상태로, 코트 바깥쪽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깜빡이도 없이”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꾸했다. 불쾌감보다는 당혹감에 초점을 맞춘 셈이었다.


 “아니, 형 이상하잖아요. 하루도 안 빠지고 맨날 여기 나와서 농구나 하고 있고”


 “농구하는 게 뭐 어때서? 넌 농구가 부끄러워?”


 “그런 말이 아니라요. 다른 사람들은 다 일하거나 공부하러 나가는데. 형은 왜 맨날 여기서 놀기만 하나 싶어서요. 그렇다고 야간에 일을 나가는 인간 같지는 않고”남학생이 내가 앉아있던 벤치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저야 학생이니까 상관없는데, 형은 좀 위험한 거 아니에요? 이런 날 오후에 농구장 나와서 자기보다 한참 어린애들 양학이나 하고...”


 “그러니까 슛 연습 좀 하라고. 실컷 발린다음에 인신공격하는 건 대체 어디서 배운 거냐?”


 “아, 저도 형처럼 밥먹고 슛만 연습하면 형보다 훨씬 잘 쏠 걸요”


 “어린 게 말하는 본새 좀 봐. 누가 밥 먹고 슛만 쏜다 그래?”


 “형이요. 형 아니고 여기 누가 있어요?” 남학생이 정색하며 대꾸했다.


 “아니야. 전혀 그렇지 않다고”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나도 하는 일이라는 게 있어. 그냥 남들과 다른 일을 할 뿐이지. 니가 어려서 아직 잘 모르나본데. 세상에는 참 다양한 일들이 있거든. 꼭 어디 출근해서 의자에 앉아 있어야만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그래서 형이 하는 일이라는 게 뭔데요?”


 “나?”


 “네. 형”


 “나는 글을 쓰지”


 “글을 쓴다고요?”


 “그래” 내가 대답했다. 


 “그럼 작가에요?” 재차 물어오는 남학생의 눈빛에 묘한 기대감이 묻어나왔다. 그러나 그런 세간의 기대와는 별개로, 나는 나 자신을 더러 작가라고 설명하는 데에는 익숙하지도 않거니와 오히려 원인모를 거부감마저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 별 것도 아닌 대꾸에 “꼭 그런 건 아닌데, 그렇다고 하면 딱히 아니라고 할 수도 없지만……” 하고 모호한 답변을 내놓고 말았다. 


 “뭐야, 그럼 그냥 작가 지망생?”학생은 좀 전에 비해 밋밋한 어투였다. 난 왜인지 자존심에 흠집이 난 기분이었다.


 “그런 걸 지망하고 있지도 않아”


 “아. 그냥 백수 아니에요?”


 “그러니까, 백수는 일을 아무 것도 안 하는 거잖아? 그래서 돈 벌이가 하나도 없는 거고”


 “그렇죠”


 “그런데 나는 내가 쓴 글로 돈을 벌고 있기는 해. 그렇게 많은 돈은 아니지만…… 누가 하천에 빠트린 농구공을 새로 사줄 정도로는 겨우 번다고 볼 수 있지”


 “아, 그거 벌써 한 달 된 거 알아요? 내가 드러워서 갚는다, 갚아” 남학생이 인상을 팍 썼다.


 “됐어. 중딩한테 내가 뭘 기대하고…… 그냥 사주고 싶어서 사준 거야”


 “왜 사주고 싶었는데요? 혹시 취향이……”


 “그런 건 아니고” 나는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어린놈들의 개소리는 내버려둘수록 골치가 아프기 때문이다. “공이 없어서 농구를 못한다는 건 쓸쓸하잖아. 딴 것도 아니고. 시간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그런 이유들은 딱히 중요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지…… 그런데 공이 없어서 공놀이를 못한다는 건, 그것보다 더 심한 비극도 없거든”


 “방금 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아무래도 공이 없으면 공놀이를 할 수 없다는 거야. 시간이나 돈이 아무리 많아봤자. 농구공이 없으면 농구는 할 수 없지”나는 하천 너머 도로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로가 위에는 문닫힌 상가가 언덕 능선을 따라 주르르 타고 올랐고, 그쪽 먼동으로부터 선거유세소리가 넘어와 흩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선거가 며칠 남지 않았다.


 “그건 당연한 얘기 아니에요? 뭐 그런 얘길 진지하게 해”


 “그건 니가 중학생이니까 그렇지. 나도 중학생 땐 멍청했어”


 “뭐야, 지도 아직 서른도 안 됐으면서” 학생이 투덜거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농구공을 우레탄 바닥에 몇 번 튕기고 잡는 소리가 뒤이어 났다.


 “형은 투표했어요?” 학생이 다시 말을 꺼냈다.


 “아니”내가 말했다.


 “할 거에요?”


 “해야지. 안 할 수 없지”


 “그렇죠? 하, 부럽다……” 학생이 중얼거렸다. “나라꼴이 참 거지같은데. 저도 빨리 나이 먹고 투표하고 싶네요”


 “그래?”


 “네”


 “나랑 똑같네”


 “뭐가요?”


 “나도 투표를 너무 하고 싶었거든. 뭐라도 내가 선택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좋았어. 어디 투표만 그런가? 어른이 되면 뭐든 다 내가 선택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어렸을 때보단 선택지가 많아지지 않았나요?” 학생은 제법 의젓한 목소리를 냈다. 안색을 힐끔 보니 본인도 알고 있는 듯한 모양이었다.


 “흠. 이제야 질문다운 질문을 하네” 나는 손가락 등으로 코 밑을 습관처럼 쓸어 비볐다. 사흘이나 면도를 하지 않아 촘촘히 자란 수염이 따끔거렸다. 


 “그거야 형이 말 같은 말을 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그건 맞는 말이야” 내가 다시 대답했다. “어른이 되면 선택지가 많아지는 건 사실이지. 그런데 영영 선택하지 못하게 되는 것도 있어”


 “그야 다시 어려지는 건 안 되죠……”학생은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그런 거 말고”


 “그럼요?”


 “선택하지 않을 수가 없게 돼. 그러니까……”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말을 이었다. 순간 왼쪽 무릎이 시큰거렸다. “<선택하지 않는다>는 선택지가 영영 없어지거든. 어른이 되고 나면 아무도 나대신 선택해주지 않으니까. 심지어 내가 선택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것에조차 책임을 져야하니까. 일단 도장을 들었으면 뭐라도 찍어야 해. 펜을 들었으면 아무리 구린 글이라도 일단은 써내야하지. 그게 두려운거야”


 “형. 이제 갈 거에요? 한 판 더 안 해요?” 학생은 뒤따라 일어나 내 뒤통수에다 대고 물었다. 


 “안 해” 내가 말했다. 


 “자신이 없어서 그렇죠?”


 “그래. 자신이 없어”


 “하하. 운 좋아서 이긴 게 뽀록날까봐 그러는 거죠”


 “질 자신이 없다니까”


 “아, 바쁘면 그냥 가요” 학생이 역정을 냈다. “다음에 같이 하자고요”


 “그래” 내가 대답했다. 걸어 돌아가는 길섶에 내 원래 키보다 세 배는 큰 그림자가 검게 묻은 채로 따라 걸었다. 그보다 더 뒤쪽에선 불규칙적으로 공 튀기는 소리, 농구골대에 맞고 형편없이 튀어나오는 소리가 이어져 들리다가 자취를 감췄다. 


 두 번째 굴다리 아래를 걸어 지날 무렵이었다. 수 차례 진동하는 휴대폰을 집어 들자 부재중 전화가 한 통, 또 몇 건이 문자 메시지가 수신돼 있었다.


 [……한 달 넘게 거의 아무 것도 못 썼잖아요. 물론 그동안 열심히 했고, 누구보다 답답한 건 본인이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돌아와야죠. 글쓰는 삶으로요. 오늘은 힘내서 뭐라도 쓰는 게 어때요?]


 “아, 안 그래도 쓰려고 했다니까” 나는 말한 그대로 답신을 두들겨 쓰다 도로 지웠다. 어차피 곧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책상에 늘 그랬듯 타자기와 모니터 두 대가 놓여있을 것이다. 난 거기서 좀 더 길고 구체적인 답변을 쓸 수 있었다. 마침 그럴만한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녀석과는 언제 다시 농구를 할지 정확한 약속을 하지 않았다. 하기야 한 달 뒤건 한 두 해쯤 지나서건 그 농구장에서 농구하는 사람들이란 정해져 있는 법이다. 만약 돌아가도 보이지 않을 땐, 그 때부턴 내가 기다리면 될 뿐이었다. 그래. 글이 찾아오지 않으면 내가 글을 찾아간다. 살아갈 나머지 일들도 대충은 그런 모양이었다.           



 <돌아가는 글쓰기>, 2020. 4          




<바람이 없는 바다는 호수라는 걸>





이 글과 그림은 'Reinette' 님의 후원을 바탕으로 작업한 것입니다.  

도와주신 덕분에 더 오랫동안 쓰고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아래 링크에서 이 글과 그림을 구매하거나, 혹은 다음의 작업물을 미리 예약함으로써 이 활동을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 2018년 ~ 2019년에 쓴 약 일흔 편의 작업물 및 미공개본을 묶은 첫 단편소설집, 「시간과 장의사」가 출간되었습니다. 표지에 고양이가 그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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