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여든한번째
“제발 부탁인데” 오랜만에 친구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굳이’ 그런 얘기를 꺼낼 필요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 씨발 것의 휴대폰 좀 그만 볼 수 없냐? 그럴 거면 왜 여기 죽치고 앉아있냐? 사람 마주 앉혀놓고 화면만 쳐다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서?”
“너 뭐냐? 왜 갑자기 급발진하고 그래?” 내 옆에 앉아있던 친구가 가장 먼저 받고 들었다.
“급발진은, 미친놈아. 일 년 만에 모여 놓고선. 삼십 분 동안 의자 밑으로 휴대폰 화면만 쳐다보는 니네가 너무 느리다는 생각은 안 드냐? 씨발 너희들은 시동이 언제 걸리는 건데?”
“아, 이 새끼 존나 우리 엄마처럼 이야기해. 하여튼 서울이 인간을 이렇게 망쳐놓는다니까.” 마주 앉아있던 친구는 탁자 밑에서 시선 한 번 올리지 않고 불평했다. “일 년 만에 만나서 휴대폰을 하든 병나발을 불든 니가 무슨 상관인데? 각자 하고 싶은 거 하면 되지. 안 그렇냐?”
“아” 맞는 말이었다. 재수가 없긴 했지만 확실히 그랬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끼리는 휴대폰 한 번 만지지 않고 대화만 줄곧 해야 한다, 그런 법이 대한민국에 있다는 얘긴 듣지 못했으니까.
다만 나는 그런 법이 조례 수준으로라도 있었다면 좋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자유롭게 내버려두기엔 이건 너무 공허하지 않은가 말이다. 나는 늘 이놈들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우정의 의무처럼 생각해왔는데. 그렇게 보니 우리는 하던 대로 떨어져 사는 것보다 고독했다.
“야야, 냅둬라. 걔야 원래 예민한 애 잖어.”
“그래. 난 예민해” 내가 우습게 말했다.
“예민은, 지랄하고 있네” 마주 앉아있던 놈이 비딱하게 대꾸했다.
“지랄은 그 휴대폰 화면으로 니가 하루 몇 시간이나 해대는 걸 말하는 거고. 뭐 대단한 걸 한다고 그 사각형 플라스틱쪼가리에 목메고 있냐?”
“아, 닥쳐봐. 지금 존나 중요한 상황이니까”
“이런 씨발”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맞아. 좀 작작해라. 사람 앞에 앉혀놓고 계속 게임만 하는 건 그렇잖냐?” 옆에 앉은 친구가 거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만류하는 투였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아니, 뭔데? 무슨 얘길 하자고? 이렇게 냄새나는 남자들끼리 모여서 뭔 얘길 해? 드러워 죽겠네 진짜.”
“언제는 주제가 있고 이유가 있어서 같이 놀았냐? 왜 이렇게 삐딱하게 굴어?”
“솔직히 나는, 할 얘기가 하나도 없어. 존나 내 인생은 다를 거 없이 맨날 똑같거든. 어? 내 인생에서 가장 다이나믹하고 재밌는 것들은 죄다 휴대폰에서 일어나는 것들인데. 이젠 인생이란 게 휴대폰보다 재밌을 수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
“……야.” 왠지 나는 놈이 하는 말을 멈춰 세워야한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건 당장이라도 터져 폭발할 것 같은, 요컨대 시한폭탄의 뇌관을 밟는 대화였다.
“야는, 무슨 야냐? 지랄하지 좀 마. 우리 인생은 좆도 특별하지 않아. 고딩때야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으니까 재밌게 놀 수 있었지. 근데 지금은,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거지. 더 이상 존나게 특별한 일이 일어나서 우리 인생이 바뀔 확률은 없다는 거. 그걸 누가 모르냐? 어?” 순간 휴대폰 화면을 바닥에 내던져버리고 발칵 일어난 그 놈은 한 때의 내 친구였다. 친구는 방금 전까지 뚫어져라 응시하던 화면이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혀 조각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겨우 울음을 참고 있는 듯 충혈 된 눈으로 날 마주보다가 포차를 빠져나갔다. “앞으로는 좆같은 일밖에 없어.”라고 중얼거리면서.
아, 그 말은 정말이었다. 좋은 시절은 모두 지나갔다. 정말이지 우리의 앞날은 암울하고, 고독하고, 쓸쓸한 나머지 도망칠 곳 하나 없었다. 그 때의 나는 습관처럼 휴대폰을 꺼내들었던 것 같다. 이제 막 저녁때를 지난 시간이었다. 초겨울에는 늘 그렇듯 해가 짧았고.
<입동> 202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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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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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 2019년에 쓴 약 일흔 편의 작업물 및 미공개본을 묶은 첫 단편소설집, 「시간과 장의사」가 출간되었습니다. 표지에 고양이가 그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