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여든번째
꿈은 어떤 식으로든 소망을 반영한다.
나로선 이게 얼마나 설득력 있는 학설인지 모른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거니와, 그때는 누군가 다가와서 ‘그게 있지, 오스트리아의 프로이트라는 정신분석학자가 이야기하기로는……’ 이라고 말해봤댔자 얘길 안 하느니만 못했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나는 겨우 일곱 살짜리 꼬맹이였으니까. 말하자면 프로이트는커녕 정신분석학자나 오스트리아도 뭔지 모를 나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전부터 나는 ‘내가 원하는 무언가’가 꿈에 자주 나온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또 어른들은 어린이가 그냥 하는 말은 대수롭지 않게 듣기 일쑤지만, 뭐가 됐든 ‘꿈에 나왔다’는 말을 덧붙이고 나면 아주 별 볼일 없는 이야기조차 귀 기울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걸 나이에 비해 영악하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어린아이의 꿈자리에 지나친 의미부여를 하는 어른에게도 상당부분 책임이 있다.
가령 내가 “고양이가 갖고 싶어요.”라고 말하면, 엄마는 “그래, 그래”하면서도 속으로는 실없이 조르는 말이겠거니 하고 넘어가버렸다. 반면에 “엄마, 나 꿈에 보라색 고양이가 나왔어.”라고 했을 때는, “보라색… 뭐라고?”하며 영 심상찮은 표정으로 대꾸했던 것이다.
“꿈에 나와서 뭘 어쨌는데? 보라색 고양이가?” 엄마는 애써 관심 없는 체까지 해가며 캐묻기 시작했다.
“그게요. 고양이가 애옹-하면서, 나를 똑바로 쳐다봤어요.”
“그냥 보기만 했어?”
“네. 근데 눈이”
“눈이?”
“눈이 불쌍했어요. 뭔가, 자길 찾아서 구해달라는 거 같았어요.”
“찾아서 구해달라고?”
“네.” 나는 금방이라도 꺄르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리고 아주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안 그러면 나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요. 그러면서 사라졌어요. 보라색, 분홍색, 초록색, 연두색, 막 여러 가지 색깔로 흩어졌어요. 얼마 전에 엄마가 욕조에 넣었던 그, 요, 이요……”
“입욕제?”
“네!”
“거 참, 희한한 꿈이구나.” 엄마는 여기까지 듣고 나서, 어떤 생각에 골몰하듯 찬장 부근을 살폈다. 그래서 나는 ‘이쯤하면 됐겠지’하는 생각으로, 목적을 달성한 만화 속 악당처럼 방으로 되돌아갔다. 공교롭게도 그 날 아빠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출장차 지방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는 이유에서였다.
크게는 두 가지 오산이 있었다. 첫째는 엄마가 내 상상 이상으로 고양이를 싫어한다는 점이었고, 둘째는 그 이유가 순전히 아빠가 고양잇과 동물을 지나치게 좋아해서라는 점이었다. 그런 아빠의 고양이 사랑이 아비시니안이나 치타, 시베리아 호랑이처럼 그루밍하기 좋아하는 동물들에게나 집중됐었다면 일이 그렇게까지 꼬이진 않았겠지만…… 문제는 아빠가 고양이처럼 약삭빠르고 제멋대로인 여자들에게 아무렇게나 휘둘리곤 했다는 것이다.
“아니, 그러니까” 밤중에 거실에서 들려온 아빠의 목소리였다. “걔는 그냥 직장동료라니까. 굳이 따지면 내 직속후배라서 챙겨주기는 하지. 애가 성격도 싹싹하고 배우기도 곧잘 배워서 호감형이기는 한데, 네가 말하는 그런 사이는 절대로 아니라고”
“그거야 당연히 아니시겠지!” 엄마는 몹시 화가 나있었다. “넌 아무 것도 몰라. 그 개년이 너한테 어떻게 꼬리를 치고 있는지. 집안에 있는 나도 다 알겠는데 너만 모른다고. 그게 말이 돼? 그럼 왜 직장동료랑 퇴근시간 지나서까지 연락을 해대는데?”
“그게, 내가 약간 걔 사수 같은 느낌이 돼서…… 일 같이 하는 입장에서 열성적으로 물어오면 대답 안 해주기도 그렇잖아. 부서 내에서 협업이 잘 되면 장기적으로도 좋은 거고. 개인적인 연락을 그렇게 자주 하진 않았어. 걔도 내가 유부남인 거 알고 있고……”
“알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도 그런다고?”
“정말 아무 감정이 없으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럼 너는 어떤데? 넌 부끄럽지도 않아? 집에 와이프랑 딸자식 놔두고 젊은 년이랑 놀아나는 게, 그 나이 먹고 잘 하는 짓 같아?”
“놀아나긴 누가 놀아나? 말 좀 조심해. 애 다 듣겠다”
“언제 애새끼 신경이나 써준 것처럼 얘길 하네. 들으면 뭐 어때서? 너 계집질 하는 건 쟤도 알아.” 엄마가 이 말을 하기 무섭게, 나는 도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곤히 잠든 시늉을 했다. 아빠나 엄마, 둘 중 누구라도 내 방에 들어와서는, “너는 알고 있지? 응? 말 좀 해봐!” 하고 다그치기라도 할 것 같아서 말이다.
다행히도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세상모르게 잠들었다가 일어나서 유치원에 갔다. 유치원에선 모든 게 평화로웠다. 늘 웃으며 친절하게 대해주는 선생님, 아무 것도 모르고 뛰어다니는 친구들, 카레 냄새나는 식탁보와 구석진 곳에 숨겨놓은 나무 블록.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풍경 가운데 저녁에 찾아왔고, 날 데리러가기 위해 온 건 엄마가 아닌 정장차림의 아빠였다.
아빠는 나를 곧바로 집에 데려가지 않았다. 대신 “뭘 먹고 싶니? 오늘은 먹고 싶은 거 아빠가 다 사줄게”라고 말했다. 나는 짜장면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길로 역 근처 중국집까지 가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었는데, 그때만 해도 나는 탕수육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빠는 그런 탕수육을 안주 삼아서 소주를 세 병이나 마셨다. 덕분에 돌아갈 때에는 가게 주인의 도움을 받아 택시를 불러야했다. 그렇게 도착한 집은 무척 어질러져 있었고, 엄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결국 엄마를 선택했다. 아빠는 못내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으나, ‘갑작스런 이혼 속에서도’ 딸을 지켜냈다는 엄마의 기쁨에 비할 바는 못 됐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자충수와 다름없는 선택이었지만 말이다.
한동안 엄마와 함께 외할머니 댁으로 가서 살았다. 엄마는 해가 떠있는 동안은 줄곧 괜찮아보이다가, 밤만 되면 혼자 부엌에서 흐느껴 울곤 했다.
나는 내가 꿨던 꿈이 이 모든 비극의 단초였음을, 또 직장동료라던 그 여자가 아빠의 새 부인이 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머잖아 나는 아빠의 소개로 ‘새 엄마’를 직접 만날 수 있었는데, 날카로운 눈매에 간들거리는 목소리까지 영락없는 고양잇과 여자였다. 하필이면 이름도 보라였다. 보라, 보라색, 보라색 고양이…… 알고 보면 모든 시작이 그 보라색 고양이였다. 뭘 물어보고 싶어도 꿈에 한 번을 더 안 나오던, 야속하고 얄미운 고양이.
나는 그 뒤로 몇 년이나 고양이를 미워하며 살았다. 넉넉지 않은 양육비로 고생하던 엄마는 내가 대학생이 되자마자 병이 나셨다. 휴학계를 내고 몇 달간의 투병생활을 뒷받침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돼왔던 병 앞에선 역부족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날 밤. 나는 끝끝내 보라색 고양이가 나오는 꿈을 꿨다.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뇌리에 선명히 남았다. 원인 모를 눈물이 줄줄 흘러 옷깃을 적셨다. 아, 이제야 나타나다니. 없던 꿈을 지어낸 대가를 다 치른 지금…… 고양이는 티끌만큼의 원망도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라색 고양이>, 202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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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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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inette 님이 값을 미리 치러 주신 덕분에 이 글과 그림을 작업하고 공개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좋은 그림이 걸린 방에는 방향제가 필요없다고 합니다. 이번 기회에 작업도 후원하고, 당신만의 공간에 멋진 그림도 한 점 걸어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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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 2019년에 쓴 약 일흔 편의 작업물 및 미공개본을 묶은 첫 단편소설집, 「시간과 장의사」가 출간되었습니다. 표지에 고양이가 그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