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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an 06. 2019

습작

첫 번째

해가 질 무렵이었다. 겨울이 들어 해가 짧아지면 오후 여섯 시가 채 안 되고도 뉘엿뉘엿하고 노을이 지기 시작한다. 사당역 부근은 종일 차와 사람으로 붐볐는데, 본격적인 퇴근 시간이 들이닥치기 직전의 그 시간에는 이상하리만큼 잠잠하고, 또 놀랍게도 고요한 느낌마저 들었다. 카페 삼 층에는 우리를 제외하고 대여섯 명의 사람이 더 있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었고, 참고서며 문제집이며 공책 같은 것을 테이블에 펼쳐놓고 바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들릴 듯 말듯한 재즈음악을 제외하면 우리가 말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나마 빈도나 소리가 잦아들어 희끄무리한 노을빛이 스며드는 창가 자리에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돌았다. 


“이제는 괜찮아. 다 지난 일이고……”


네가 아주 작은 소리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네 앞에는 다 마신 유자 찻잔이 유자 껍질 몇 가닥만 남겨놓은 채 테이블에 그림자를 늘어트리고 있었다. 그림자는 시간이 갈수록 더 길어졌다.


“괜찮은 게 어딨어, 지나간 일이라고 해서 모두 괜찮은 건 아니야” 내가 말했다.


“그러니?”


“그래. 어떤 기억들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거든. 어떤 상처들이 다 나아도 흉한 자국을 남기는 것과 비슷해”


“그럼,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예쁜 흉터로 남았으면 좋겠는 걸…… 하하”


너는 말 끝을 살짝 흐리면서 멋쩍게 웃었다. 나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런 일을 이야기하면서 왜 웃는 거야? 슬프지 않아?”


“음, 우는 것보다는 웃는 게 더 좋잖아? 흐……”


“웃지 마”


“뭐?”


“웃지 말라고” 내가 말했다.


“왜 그러는 건지 모르겠어. 나는 비웃는 게 아니었어”


“비웃는 거라고 생각해서 말한 게 아니야”


“그럼?”


“그냥, 차라리 우는 게 나을 것 같아”


“너는 내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야?”


“아니, 음, 아니야, 맞아. 그런 거 같네. 나는 네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어. 적어도 지금은……”


“그건 참 유감인 걸. 난 울고 싶지 않거든”


“아니, 넌 울어야 해”


“내가 왜 울어야 하는데?”


“네가 방금 이야기한 일은 누구라도 겪어선 안 되는 일이었어”


“내가 잘못한 부분도 분명 있는 걸. 나만 슬퍼할 자격은 없는 것 같아”


“슬퍼할 자격이라는 건 없어. 슬프면 그냥 슬픈 거지”


나는 테이블 끄트머리를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 고개를 네 얼굴 쪽으로 들이밀면서 말했다. 비록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의미심장한 방식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나는 그냥 이겨냈다고 말하는 거야.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까, 웃으면서 말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야”


“그건 이겨낸 게 아니야. 도망친 거지”


“뭐라고? 난 도망치지 않았어. 그 사람을 마주 보고 제대로……”


“아니. 내가 말하는 건 너와 네 감정이야. 그 사건이 아니라…… 그 일로 인해서 진심으로 펑펑 울어본 적이 있어?”


“그래야 할 필요가 있어? 눈물은 흘리지 않을수록 좋은 거잖아”


“아니야.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슬픈 일들을 마주하고, 어떤 슬픈 일에는 충분히 슬퍼하고 울 수 있어야 해. 그런 슬픔들을 제대로 마주하고, 뚝뚝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해”


“세상에는 이 것보다 더 슬픈 일들이 많아, 가령……”


“이렇게 슬픈 일에도 슬퍼하지 않고 웃는 네 모습이 더 슬퍼. 아무리 슬퍼도 슬퍼하지 말아야 할 사람과 시간들로부터 둘러싸여서, 슬퍼할 수 없는 네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네 표정이 내게는 가장 슬퍼”


“……미안해”


“사과하지 마, 괜찮아. 나한테 사과할 일이 아니니까”


“아니야, 미안해. 어쩌면 나는 너무 오래 울지 못해서, 우는 방법을 잊어버린 건지도 몰라. 아무리 해도 눈물이 안 나오는 걸……”


넌 또다시 말끝을 흐렸다. 다만 이번에는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물기로 된 각막이 네 동공을 뒤덮고 있었고, 자칫 결정이 맺혀 볼에 흐르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난 안경을 벗었다. 양손으로 맨 얼굴을 가린 뒤에 소리 없이 울었다.


“너 지금 울고 있니?”


“응”


“왜 울어?”


“슬프니까. 넌 슬프지 않니?”


“아니, 나도 슬픈 것 같은데…… 도저히 눈물은 안 나와. 정말 잊어버린 것 같아”


“우는 방법은 잊어버릴 수 없어. 애초에 배운 것도 아니니까……”


“그럼 울지 못하는 사람은 뭐가 문제인 걸까? 잊어버린 게 아니라면”


“누구나 우는 방법은 알고 있어. 단지……”


“응”


“어떤 사람은 울지 말아야 할 이유를 더 잘 알고 있을 뿐이지”


“……”


너는 울고 있었다. 나는 네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때때로 아주 작고 높은음을 내면서 계속해서 울었다. 그즈음 해는 완전히 넘어가서 사당역 공영주차장 위로 밤하늘이 깔렸다. 고가도로와 이어진 교차로에는 가로등이며 저녁 손님을 맞이하려는 가게들의 간판 같은 것들이 일제히 불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카페 아래층의 버스정류장에는 퇴근 후 경기도로 빠져나가려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고, 몇 명은 우리가 있는 카페 층으로 올라와선 우리를 힐끗 보더니 수군덕대기도 했다. 


우리가 카페를 빠져나왔을 때, 사당역 부근은 수많은 차와 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또 성난 택시들의 크낙션 소리, 올리브영 매장에서 내내 틀어놓는 케이팝 소리와 제각기 통화며 잡담을 하는 말소리가 복잡하게 뒤엉켜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눈물 흘리며 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으리란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 우리의 퉁퉁 불어 오른 눈두덩이나 촉촉한 눈꺼풀을 신경 쓸 사람도 없으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크게 소리 내어 운다고 한들 사당역에서는 아무도 듣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소리 없이 우는 사람들만이 바깥에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마>, 201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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