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묵돌 Jan 08. 2019

습작

네 번째

고시식당에는 텔레비전이 딱 한 대 있었다. 티비는 줄곧 꺼져있었다. 끼니를 해결하려는 학생들이 득달같이 몰려들 때면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티비를 켜놓아본들 보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공무원 시험 날짜가 겹쳤는지 어쨌는지 식당에 유독 사람이 적었고, 우리는 새삼스럽게 켜져 있는 티비 화면 앞에 덩그러니 마주 앉아서 소고기 뭇국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뉴스들은 말이야”


“음?” 나는 입에 국을 머금은 채 대충 반응했다.


“먹고살기 엄청 힘든가 봐. 얼마나 보도할 게 없으면 저런 유튜브 영상 같은 걸 보도하느냔 말이야. 말이 해외토픽이지, 그냥 보도할 게 마땅치 않으니까 어디서 재밌다는 영상이나 주워와서 트는 거라고. 웃긴 것도 뉴스에서 저런 말투로 보도되면 얼마나 재미없게 되는데”


네가 뉴스 화면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마침 티비 화면에는 해외에서 찍은 듯한 일반인 촬영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사람이 가득 찬 야구장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청혼을 하는 모습을 보건대 미국에서 찍은 모양이었다. 남자는 수천 명의 사람들과 수십대의 카메라가 주시한 관중석의 한가운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빨간색 탱크탑과 청바지 차림에 금발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젊은 여자를 향해 반지를 내밀었고, 곧 거절당했다. 여자는 입고 있던 옷보다 더 붉게 물든 얼굴을 하곤 야구장을 빠져나갔다. 남자의 곁으로 동정 어린 시선이 쏟아지는 것을 화면 너머로도 느낄 수 있었다.


“남자 표정 좀 봐. 아무리 그래도 여자가 너무 했네.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거절을 하다니”


“바보야? 저러면 당연히 차이지!” 네가 문득 버럭 하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는 조금 당혹스러워서,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는 눈을 몇 초 간 바라보고 있었다.


“음…… 당연히 차인다는 건 무슨 소리야? 그래도 저 정도면 꽤 공들인 프로포즈 아니야? 준비를 엄청 많이 한 것 같은데”


“준비를 많이 하고 안 하고 가 무슨 상관이야. 준비를 많이 했으면 고백을 꼭 받아줘야 한다는 것처럼 말하네”

“그런 건 아니었어”


“여자들 저런 거 엄청 싫어해. 아니, 뭐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수는 있는데, 대체로 싫어해. 적어도 나랑 내 주변 사람들은 다 그래”


“그래? 나는 으레 저런 걸 기대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응. 엄청난 착각이야”


넌 당연한 사실로 핀잔을 주듯이, 툭 내뱉고는 고개를 숙여 다시 국을 떠먹었다. 그리곤 어지간히 답답한 모양이었는지 남은 밥을 국에 말아 넣고 있었다. 나는 잠자코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국에 잠긴 숟가락을 이리저리 휘저어가며 건더기가 얼마나 남았는 지를 세어봤다.


“그래도 그런 건 있잖아.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가, 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평가하는 척도로 느껴질 수 있으니까…… 투자하는 마음이 클수록 진심도 더 잘 전달되는 거 아닐까?”


“어…… 그게 관심과 사랑인가? 상대방에 대한? 나는 그런 건 아닌 거 같애”


“그럼? 저렇게 고백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 아니야? 용기가 필요한 일이잖아. 사람들 앞에서 저런 이벤트를 한다는 것 자체가”


“아니. 오히려 용기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한 거지”


“뭐? 어떻게 그렇게 되는데?” 내가 노골적으로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너는 코로 한숨을 픽, 내쉬곤 물을 한 모금 머금어 삼켰다.


“생각을 좀 해봐. 저런 이벤트를 할 때 말이야, 사람들의 시선 가운데 서는 게 어디 남자뿐이야? 아니지. 오히려 남자보다 더 가운데 있는 건 고백받는 여자 쪽이야. 사람들은 남자보다는, 프로포즈를 받아들일지 받아들이지 않을지를 결정해야 하는 여자의 얼굴과 행동을 보고 있잖아”


“그건 그렇긴 하네. 남자 반응을 보는 건 결과가 나왔을 때 이후니까”


“그래. 막말로 남자는, 준비하면서 마음의 준비도 같이 했을 거고 그럴 시간도 충분했어. 본인이 기획한 이벤트니까. 그런데 여자 입장은 어때? 어떤 마음의 준비도 없이 저런 상황에 처한 거라구. 그냥 마음 편하게 야구장에 온 거고, 옷차림도 그냥 편하게 하고 왔는데, 남자의 돌발 이벤트 때문에 이 머나먼 한국에서까지 소비가 돼버렸던 거야. 이렇게 웃기고 무안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면, 여자가 받아들임으로써 로맨틱한 결론을 내는 수밖에 없는데…… 이건 정말 남자가 끔찍할 정도로 이기적인 거지! 혼자 고백했다가 거절당하는 게 무서워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백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은 분위기로, 자신에게 유리한 결정을 강요하는 거야. 로맨틱은 뭐가 로맨틱이야. 하여튼 영화랑 드라마가 사람들 다 망쳐놨다니까. 정말이지”


너는 일장연설을 하면서도 꾸역꾸역 잘도 먹어댔다. 덕분에 넌 밥을 거의 다 먹었는데, 나는 그릇의 절반도 비우지 못하고 있었다. 난 네 연설에 응답할지 아니면 속도에 맞춰 밥을 먹을지를 잠깐 고민했다.


“네 말 뜻은 충분히 알겠어. 그렇게 보면 정말 남자가 이기적인 걸…… 그래도 있잖아, 남자의 최선을 다한 노력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 않을까? 뭐가 됐든 여자에게 뭔가, 거대한 마음을 품고 있는 건 확실한 거잖아. 많이 사랑하고 있으니까 저런 행동을 한 거고. 욕먹을 만한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해”


나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너는 국그릇을 끝까지 긁어 넘기고, 휴지로 입가를 대충 닦았다.


“음…… 마음이 크긴 크지”


“그렇지? 나중에라도 잘 됐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지금은 거절당했지만 훗날에는 해피엔딩이 되길 바라야지”


“그래, 마음이 크긴 커. 소유욕과 과시욕 같은 것 말이야. 정말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상대방 입장에서 저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부터 먼저 고려했겠지…… 만약 결혼을 받아들였더라도 금방 이혼했을걸? 장담해”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을 해야겠어? 먼 나라 사람인데 해피엔딩을 기도해줄 수도 있지”


“해피엔딩? 뭐가 해피엔딩인데?”


네가 되물었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난 조금 잦아들었다.


“그건…… 글쎄……”


“결혼은 해피엔딩이 아니야” 네가 말했다.


“그럼?”


“보통은 오프닝 아닐까? 스릴러나 공포 영화의……”


“음”


나는 고뇌하는 표정으로 일어섰다. 넌 내가 식사를 다 끝냈다는 건 안중에도 없다는 것처럼 함께 일어났다.

우리는 그 길로 식당을 떠나 빠져나왔다. 그날 밤 나는 학원에서 일찍 돌아와서, 서랍 속의 반지를 몰래 확인했다. 상상하던 멜로 영화는 시작도 못하고 사각형 안에 고여있었다. 가난한 마음에 내 눈물 몇 방을 담아 도로 멈춰두었다. 그 때문인지, 이듬해 합격 소식과 함께 멀리 떠난 네 뒷모습 다음에는 다른 어떤 장면도 펼쳐지지 않았다. 이젠 못 쓰게 된 장면이었다.


<NG>, 2018. 12




매거진의 이전글 습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