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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Feb 13. 2019

습작

열 번째


“적어도 한국보다는 낫지 않을까? 최소한 미국이나 캐나다는…”


“멍청한 소리야”


건너편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여자가 말을 가로막았다. 나는 하던 하던 말을 멈추고 여자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눈썹 바깥쪽으로 아이라인을 굵고 날카롭게 그려 올린 여자였다. 보라색 아이섀도와 함께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어쩐지 겸연쩍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강의실은 수업이 끝난 지 일 분이 넘었지만, 함께 밥 먹을 친구를 구하거나 짐을 챙기거나 하는 학생들로 붐벼 어수선했다. 


“……서양애들만큼 미개한 새끼들도 없어. Trust me”


“아, 네 이름이……”


“수잔이야. 캘리포니아에서 육 년? 오 년? 아무튼 오래 살다왔다 그랬지?”


내가 어물거리자, 곁에 있던 친구가 대신 말했다. 수잔은 노란색 백팩에 교재를 마저 챙겨 넣곤 우리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Yes,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까 들어버려서. 그럼 같이 밥 먹으러 갈래?”


“어, 그럴까? 넌 어때? 수잔이랑 얘기도 하고”


“어…… 나도 괜찮아. 근데 강의가 한 시간 뒤에 바로 있어서 멀리는 못 가”


“멀리 갈 필요 없어. 그냥 학식이나 먹으러 가자”


학식까지는 십 분이 좀 넘는 거리였다. 그동안 나와 내 친구, 그리고 수잔이라는 아주 기이한 조합은, 나란히 걸어가면서 내 북미 유학 계획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했다.


“영어, 잘하는 거야?” 수잔이 물었다.


“아니, 잘하고 싶어서 가는 거지. 이미 잘하면 유학 같은 걸 왜 가겠어” 내가 대답했다.


“간다고 다 잘해지는 건 아닌데. 그 많은 돈 주고 와서, 한인들끼리만 어울려다니다가 그냥 Korea, 오는 애들도 많이 봤어”


“하긴, 정말 배울 거면 한국에서 못 배울 건 없지. 원어민 교사도 얼마나 많은데. 우리나라처럼 공부하기 좋은 나라도 없다니까”


친구가 수잔의 말을 거들었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웃었다.


“웃을 일이 아니야. 유학 가면 일이 년은 기본인데. 신중하게 결정해야지”


“뭣보다 인종차별, 엄청 심해. California 가 비교적 덜 한데도 그래. 백인 애들, Asian girls 어떻게 취급하는지는, 오, 정말 경험해봐야 알아”


“그렇구나. 나는 그냥, 뭐 진지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고…… 그냥 아빠가 생각해보라니까 얘길 한 거지 뭐”


나는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반성하듯이 말했다. 수잔은 끊임없이 나와 아이컨택을 시도했는데, 난 그게 말할 수 없이 부담스러웠다. 일 년 간 뉴욕인지 뉴저지인지를 다녀왔다는 내 친구는 수잔과 능숙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난 복잡한 기분이었다. 말하자면 소외감과 가장 비슷했다.


“갔다 와서도 TOEIC Scores, 팔백 점도 안 나오는 애들 수두룩해. 그럴 거면 유학을 왜 가는 거야? I can't understand, 모르겠어. 너무 멍청해. 강남에서 바보 같은 어학원 다니는 게 몇 배는 나아”


“아하하, 얘는 그 바보 같은 어학원도 다녔다니까. You know? 파고다였나?” 친구가 또다시 수잔을 거들었다. 


“영단기야. 파고다 아니고” 나는 나도 모르게 삐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게 그거지. 이름만 다르고 모회사는 다 똑같을 걸? 왜 그렇게 영어에 집착하는지 통 모르겠다니까!”


“That’s exactly what I think! 왜 그러는 거야? 정작 회사 들어가고 나선 쓸모없잖아. That’s So Useless, Isn’t it?”


수잔은 크게 맞장구치곤 친구와 함께 웃어댔다. 나는 가만히 있기가 그래서 따라 웃었는데, 막상 웃고 있자니 더 어색했다. 


“그럼 수잔은 인종차별 같은 게 불편해서, 대학을 한국에 온 거지? 재외국민 전형, 뭐 그런 건가?” 친구가 수잔에게 물었다.


“No, No, 나는 특기자 전형이었어. 재외국민은 체류 시간인가 뭔가가 기준이 좀 안 맞아서. 그래도 영어를 하니까”


“아, 그렇구나. 그럼 수능은 본거야?” 내가 물었다.


“Wut, 수능? 아아, Korean SAT, I know it, But I didn’t”


“특기자니까 수능은 안 치지. 너 같음 치겠냐? 수잔, 네가 이해해. 얘가 수능으로만 대학을 왔거든. He did very well, so……”


“Yeah, I understand, 공부 잘했었구나”


“그래, 고등학교 땐 잘했지, 고등학교 때는 말이야……” 


나는 말 끝을 흐렸다. 친구와 수잔의 대화는 점심식사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수잔은 식사가 끝나자마자 급하게 전화를 받더니, 몇 마디 영어로만 된 대화를 하다가 돌연 인사를 하곤 문 바깥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수잔이 입은 줄무늬 민소매와 갈색 숏팬츠, 그리고 그 옆과 아래로 내리 뻗은 두 쌍의 곡선과 살짝 그을린 살결이 멀어지는 것을 멍하게 지켜봤다.


“수잔 예쁘지?” 내 시선을 눈치챈 친구가 얄궂게 물었다.


“응. 피부톤이 매력적이야” 난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남자 친구 있다더라. 한국인인데, 걔도 유학생이래”


“엄청 잘 아네” 나는 조금 비아냥대는 투였다.


“엄청 잘 알지. 관심 있어서 여기저기 물어봤었거든. 지금은 아니지만. 아, 수잔네 아빠가 화교래. 대림동인지 

어딘지에서 엄청 사업을 크게 하신다던데. 따로 공장도 있다더라”


“……그래? 그럼 그 사업 물려받아도 되는 거 아니야? 왜 굳이 캘리포니아까지 유학을 보냈대?”


“물려받기는. 공장일 같은 걸 수잔 같은 애가 어떻게 감당해? 거기 외노자가 얼마나 많은데. 그런 곳에서 젊은 여자 혼자 사업해보겠다고 했단 봐. 차라리 할렘에 혼자 있는 게 더 안전할 걸”


나는 친구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퇴식구에 먹다 남긴 학식을 던져놓은 뒤 혼자 다음 강의실로 향했다. 개강한 지 얼마지 않은 캠퍼스는 유독 생기가 없어 보였다. 바쁘게 돌아다니는 학생들 대부분은 희거나 검은 방진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생각 없이 보고 있던 휴대폰 화면에 익숙한 기사들이 지나다녔다. 중국발 황사 및 미세먼지의 영향으로 호흡기 질환자가 이십 프로 넘게 증가했다는 소식, 지난달 해외여행을 떠난 내국인이 역대 최대 규모였다는 것이며, 평년기온에 비해 급격히 하락해 당분간 무척 추울 예정이라는 이야기나 국민연금의 지속 불가능성에 대한 말들이, 오늘도 어김없이 오가는 중이었다. 


정문 근처에 위치한 강의동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강의동 입구 옆에는 낡은 게시판이 있었는데, 해외취업 컨퍼런스에 대한 안내와 창업지원사업 소개 포스터가 연달아 붙어 있는가 하면 또 그 옆에 작은 글씨로 따박따박 채워 넣은 대자보가 왼편 한쪽 끝 테이프가 떨어져 나간 채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대자보는 얼마지 않아 완전히 떨어져 나갈 것 같았는데, 지나가는 사람 가운데 그 대자보를 걱정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내가 마지막 강의를 마치고 강의동에서 빠져나온 건 저녁 무렵이었다. 대자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고, 나는 

곧 그런 대자보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금의야행>, 201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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