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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ul 11. 2019

습작

쉰아홉번째

 당시 여름은 한층 깊어 해가 진 뒤에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수원역 광장에서 도청오거리로 가는 번화가에 십대에서 이십대, 많게는 삼십대의 젊은 남녀들이 제각기 무리를 지어 다녔다. 도시의 윤곽선이 형형색색의 간판이며 네온사인의 불빛으로 수놓아졌다. 골목골목에는 술집이 가로수처럼 늘어섰고, 시끌벅적한 소리가 매캐한 냄새와 함께 길가까지 번져왔다. 가게 앞에는 담배 피는 남자들이 자주 보였고, 여자도 가끔 보였다.

      

 짧은 치마에 긴 생머리를 하고 있던 그 여자도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짙은 아이라인과 새빨갛게 칠한 입술이 유독 눈에 띄었다. 손톱은 그보다 조금 연한 버건디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중지와 검지 사이에 낀 담배필터 앞부분에 틴트인지 립스틱인지가 묻어난 것이 보였다.  

   

 여자는 계속해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실례가 될 만큼 여자를 자세히 관찰했다. 이성적으로 마음에 들어서는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 여자가 풍기는 공허함인지 쓸쓸함인지가 금요일 밤의 수원역 광장과는 무척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여자들이 서서 담배를 피울 때는 자세가 한결같다. 한쪽 팔짱을 낀 상태로 담배를 쥔 쪽의 팔꿈치를 다른 쪽 손목 위에 올려 걸친 채 피우는 것이다. 누가 ‘여자는 되도록 이 자세로 담배를 피시오’ 하고 정해놓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무튼 그 여자도 똑같은 자세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담배가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달리 할 것도 없고, 이미 입에 붙어버렸으므로 어쩔 수 없다는 모습으로.     


 어떻게 보면 아주 한결같은 인간이었다. 나와 처음으로 관계를 맺었을 때도, 몇 달 쯤 지나 느닷없이 ‘생리를 안 한다’고 말해왔을 때도, 속도위반으로 결혼을 결정했을 때나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을 떠날 때에도 그랬다. 비행기 화장실 안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걸린 직후 역시 ‘비행기가 잘못했다’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서있을 뿐이었지, 이제나저제나 뭐가 문제라는 눈치는 전혀 없었다.      


 임산부에게 술과 담배가 좋지 않다는 사실이야 나도 알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어딨겠는가? 그러나 아내는 ‘술 담배는 임산부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좋지 않다’는 말로 일축해버렸다. 나는 구태여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기로 했다. 이미 확인한 얘길 더 해봐야 서로 스트레스만 받을 뿐이고, 스스로 필요성을 느끼면 알아서 끊겠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의 지능이 남들보다 낮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이는 몸을 뒤집는 것에, 두 발로 서는 것에, 제대로 된 단어를 발음하는 것에 모두 어려움을 겪었다. 아내는 다니던 회사에 휴가까지 내고 아이의 교육에 몰두했으나 큰 차도는 없었다.      


 “꼭 담배 때문에 그런 건 아닐 수 있어. 원래 선천적으로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내가 말했다.     


 “아니, 됐어. 안 그래도 이제 슬슬 그만하려던 찰나였고. 돈도 한두 푼 아니니까” 아내가 대답했다.      


 실제로 아내는 반 년 넘게 담배를 입에도 대지 않았다. 대신 요가며 필라테스 같이 담배를 대체할 만한 취미를 찾았다. 담배가 사람의 체취에 그토록 거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건 뒤늦게 알았다. 여태 몰랐던 아내의 체취가 집안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아이는 한동안 편안해보였다. 못 하던 말을 덜컥 하게 되진 않았지만, 적어도 일어나 걸을 정도는 됐다.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한참 늦은 셈이었지만 별 상관없었다. 그러나 한두 번 열병을 앓으며 받았던 정밀검진에서 선천성 아토피와 천식이 나타났을 때에는 다소간 심란했다. 아기가 받았을, 또 앞으로 받아갈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아기가 갖고 태어난 모든 아픔과 고통을 자신의 원죄로 삼는 아내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기의 고통 따위 알 바 아니었다. 좀 잔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기야 아프든 아프지 않든 우는 것밖에 못하는 존재이고, 아내는 그보다 훨씬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갈등상황에 있었다. 이제 와서 담배를 끊는다고 한들 아이의 상태가 나아지진 않을 것이었다. 뭣보다 그 때의 아내는 살아오면서 가장 담배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담배 한 대를 바라는 마음 자체가 죄악이 된다는 것은…… 아내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짐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파트 십이층에서―희귀난치병을 앓는 아이를 품에 안고― 투신한 여자가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다만 여러분은 선하거나 악한 사람을 구분하기 이전에,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약한 존재냐 하는 것을 알아야한다. 아내는 강하고 싶었지만 약한 인간이었다. 아이도 그랬고, 나도 그렇다.   

  

 내전 중인 나라에서 부모를 여의고 태어난 소년이, 총을 들어 적에게 쏘아대는 것은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약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댓글 창에서 걱정 없이 선할 수 있는, 선한 곳에 서 있을 수 있는 당신들에게 하염없이 부러운 마음을 보내며, 나는 죽는다. 죽어서 아내와 아이의 곁으로 간다. 이제 여러분은 이 부도덕한 유서를 반찬삼아, 댓글 창에 특권으로서의 도덕이며 절대선 따위를 유감없이 운운해보길 바란다. 여태껏 잘도 그래왔듯이…….     


<수원 일가족 투신자살 사건의 전말>, 2019. 7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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