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브리아의 고양이 조향사

by Cindy in Wonderland

조향사는 보이지 않는 향을 조합해 하나의 기억, 감정, 세계를 만들어낸다.

향을 구성하는 탑, 미들, 베이스 노트를 세심하게 쌓아 올리며,

시간에 따라 드러나는 순서를 고려해 향기를 설계한다.


나도 천천히 내 안에 쌓여 있던 시간들의 향을 하나씩 꺼내어 본다.


탑 노트 — 스크린 너머의 디지털 세계

가볍고 날렵하게 다가와서 흔적 없이 사라지는 나의 첫인상.

무게감은 없지만, 마음을 자꾸만 흐트러뜨리는 무형의 기록들.

때로는 잊고 있던 나의 가능성을 반짝이게 해 주지만

사람들이 그것이 나의 전부라 착각하게 만드는 얄궂은 향.


미들 노트 — 물리적 공간 속 물건들

하루의 대부분이 머무는 중심, 나를 가장 쉽게 설명해 주는 향.

거실의 소파, 낡은 책장, 손때 묻은 찻잔 하나하나 속 기억의 질감.

내가 선택하고 쌓아 올린 것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가장 나다운 풍경.

삶의 무게가 가장 선명하게 머물기에 비우려 하면 나를 잃을까 가장 망설이게 되는 향.


베이스 노트 — 나의 내면

천천히 하지만 반드시 향수의 끝에서 가장 오래 남는 향.

말하지 않아도 곁에 오래 머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아우라.

나조차 가끔은 닿지 못하는 마음의 가장자리,

나라는 사람을 깊고 은은하게 지탱해 주는 결국에는 전체를 정의하는 본질.


무슨 노트를 먼저 비우고 다시 쌓아갈까 가만히 생각해 본다.

역시 탑노트를 가장 먼저 설계하고 싶었다.


조향사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탑 노트, 베르가못.

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 해안에서 처음 발견된 이 녹색 황금은

레몬처럼 날카롭지 않고, 오렌지처럼 달콤하지 않다.

맑고 투명하지만 우아한 여운을 남겨 거의 모든 향과 조화를 이루며 첫인상을 밝게 열고,

또 전체 향초를 부드럽게 아우르는 조화의 축이 된다.


나의 디지털 세계도 베르가못을 닮길 바란다.

낯선 이에게는 산뜻한 미소로, 가까운 이에게는 오래도록 스며드는 온기로,

나의 삶 속 다양한 향과 조화롭길 바란다.


보이지 않는 스크린 너머에서도 내가 사랑한 것들의 온기와 결이 전해지고,

언젠가 누군가에게 작지만 확실한 위안이 되는 '균형의 향'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여덟 시 이후 디지털 디톡스를 시작했고,

책을 더 자주 읽고 나의 일기에 살을 더해 처음 에세이를 쓰게 되었다.

오래된 사진과 파일을 정리하며 불필요한 하드 드라이브를 비워냈고,

중고거래 플랫폼과 구독 해지를 통해 약간의 츄르값이 생겼다.

온라인 강의는 아직도 ‘찜’만 해두고 있지만, 지도를 펴고 우리의 여행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리노루나와 교감하는 시간이 눈에 띄게 늘었다.

나의 멋진 고양이 조향사들은 나의 새로운 시작을 온몸으로 응원했다.


엄마의 디지털 디톡스를 응원하는 리노루나


비워낸 자리에는 노력하지 않아도

언제나 무언가가 찾아왔다.


베르가못의 잔향 끝에서 나는 다시 시작을 떠올린다.

또 다른 노트를 얹고 또 다른 계절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 향이 끝나는 자리에 다음 나의 이야기가 피어오르기를 바라며.


나는 새로 조향 하기 시작한 내 인생의 탑노트가 벌써 퍽 맘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