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숲으로 간 이유

by Cindy in Wonderland
탑 노트 — 스크린 너머의 디지털 세계
미들 노트 — 물리적 공간 속 물건들
베이스 노트 — 나의 내면


그렇다면 미들 노트에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채울까?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낯설지만 반가운 변화가 찾아오기를 바라며

혼란스럽던 시기, 나에게 작은 나침반이 되어준 방법을 공유하고자 한다.


처음에는 공간을 분류하고 각 공간이 주는 힘 - 한 줄 정의를 써 내려갔다.


예를 들면

거실은 “완벽한 우리만의 오아시스”,

서재는 “창의력이 자라는 곳”.


그렇게 정의된 공간 위에 채움 목표와 비움 목표를 세웠다.

나는 이 공간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가?

어떤 것들이 그 기능을 방해하고 있는가?

놀라운 건, 단순한 ‘적는 행위’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물질적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 선명해졌다는 점이다.

더 많은 것을 들이는 것보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걸 위해 무엇을 덜어내야 하는지가 명확해졌다.


공간의 정의, 채움과 비움 목표 정하기


이렇게 나만의 공간 언어를 정리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어떻게 물건을 정리할까’라는 고민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정리는 더 이상 ‘버리는 일’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 그 방향에 맞게 공간을 조율하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진짜 내 삶을 다시 설계하고 있었다.


완벽한 우리만의 오아시스


공간의 정의가 명확해졌다면 이제는 ‘물건’들이 머물 공간을 정해줘야 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을 카테고리별로 나누고, 중복되지 않도록 ‘있어야 할 곳’을 지정했다.


예를 들면,

주방에서만 사용하는 칼은 딱 한 세트만

서랍 속 메모지와 펜도 꼭 필요한 수량만.


물건들의 자리 정하기


그동안 가졌던 취미 관련된 용품들도 정리하며 보낼 준비를 했다.

본전 생각하면 팔기 아깝지만

햇빛도 들지 않는 상자 속에 평생 넣어두는 건 물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취미 용품을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중고거래 플랫폼에 내놓았다.


하지만 역시 인생은 아이러니.

자동 물걸레를 25만 원에 팔 고 온날, 25만 원짜리 과속 티켓을 끊겼다.


다음은 물건을 조금씩 정리하면서 깨닫게 된 사실 몇 가지.


1. 생각보다 쓰지 않는 물건이 많다.

일 년에 한두 번 쓰기 위해 아이라이너와 리무버를 보관할 필요는 없다.


2.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물건도 많다.

예전엔 좋아했지만, 지금은 루나 때문에 사용할 수 없는 향초처럼.


3. 중복되는 물건이 생각보다 많다.

두 명이 사는 집에 손톱깎이가 다섯 개나 필요하지 않다.

'아마존 물류창고가 내 창고다'라는 마인드가 오히려 평화를 준다.


4. 떠나보낸 물건은 쉽게 잊게 된다.

지금껏, 없어서 후회한 물건은 단 하나도 없었다.


5. 비움은 모멘텀이다.

한 번 비우기 시작하면 그 탄력은 놀라울 만큼 강하다.

오늘은 무엇을 비울까 생각하는 하루는, 꽤 설렌다.


그렇게 내 키만큼 자란 잡초들을 베며 한참을 지나 도달한 곳의 견고한 나무.

그 나무에서 한 발짝 두 발짝 떨어져서 올려다보니,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숲이 보이기 시작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스물여덞의 나이에 도끼 한 자루를 들고 숲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는 문명사회를 등진 채 호숫가 숲 속으로 들어가 오두막을 짓고 혼자 살며

그때의 경험과 깨달음을 <월든>에 담았다.

그는 이야기한다.

내가 숲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비록 돈은 없었지만, 햇빛 찬란하게 빛나는 시간과
여름날을 마음껏 누렸다는 점에서 나는 부자였다.


비록 실직을 하고 돈은 없었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시간과

가을과 겨울을 리노루나 남편과 마음껏 누렸다는 점에서

그 해 겨울 나는 부자였다.


그리고 다시 봄.

나는 숲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