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어머니 나쁜 며느리

by Cindy in Wonderland

차가운 새벽공기를 가르던 따뜻한 부엌의 온도.

내 어린 시절 명절의 기억이다.


명절 삼 일 전부터 모든 며느리들이 총출동해 산더미 같은 전을 부치고,

나는 그 틈에서 엄마 눈치 보며 빈 그릇을 날랐다.

매캐한 기름 냄새 속에서 하루 종일 수저를 놓지 못한 여자의 이름은 “며느리”였다.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의 할머니에게 지금의 나는 나쁜 며느리일지도 모르겠다.


연애시절 1박 2일 여행 후 남편을 집에 데려다주면서 시어머니를 처음 뵈었다.

“오는지 몰라서 아무것도 준비 못 했네, 미안하다” 하시며 양손 가득 음식을 들려주신 그 따뜻한 손.

우리의 첫인사였다.


우리 어머니는 참 정이 많은 분이다.

내가 맛있게 먹었던 반찬은 꼭 기억해 두셨다가 다음에 갈 땐 더 넉넉히 준비해 챙겨주신다.

남편이 학회로 집을 비우는 날이면,

요리와 친하지 않은 내가 밥을 제때 챙겨 먹지 않을까 걱정되어

밥 먹으러 오라고 꼭 남편을 통해 전해주신다.

혹시 내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직접 연락은 절대 먼저 하지 않으신다.


시댁에서 나는 늘 귀한 손님이다.

접시 하나 나르게 두지 않으시고 오직 음식 간 볼 때만 부르신다.

우리 할머니가 보셨다면 기함하실 노릇이다.


그리고 시댁에는 리노와 루나에게는 삼촌뻘 되는 엘피와 제이미라는 고양이가 살고 있다.

엘피와 제이미는 자유로운 동네의 마스코트인데 요즘엔 옆집 공사를 멀찍이 떨어져 관리감독 하면서 지내고 있다.

엘피는 아침마다 시어머니와 동네 산책을 할 정도로 유대가 깊다.

가끔 사람 음식을 주셔서 나를 놀라게 하시지만

나는 그 마저 다른 사랑의 방식으로 존중한다.


이 포동포동한 고양이들을 보면 시어머니가 얼마나 따뜻한 분인 지 알 수 있다.

나를 비롯해 시어머니가 키우는 모든 것들은 포동포동 해 진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고부갈등’이라는 단어는 내게 낯설다.


리노루나의 삼촌, 제이미와 엘피


우리 엄마아빠도 남편에게 쿨한 장인장모다.

가족 여행 중 어느 날 남편이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요” 하면,

두 분은 더 묻지 않고 “그래, 푹 쉬어” 하신다.


이토록 쉬운 관계라니 우리는 단지 운이 좋은 걸까? 생각하던 어느 날, 이 평화의 힌트를 발견했다.


바즈와 나, 여동생과 여동생의 파트너 - 우리 네 사람은 영어로 소통한다.

반면, 부모님과 시부모님은 영어가 편하지 않으시다.

그래서 서로, 필요 이상의 말을 섞지 않는다.


이 ‘불완전한 소통’이 오히려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줄여주는 건 아닐까 싶다.


서로 잘하려 애쓰되 과하지 않게 거리를 두는 태도.

넘지 않는 거리, 굳이 하지 않는 질문, 그리고 불완전한 언어.

과도하게 관여하지 않고 애써 바꾸려 하지 않으며,

그저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고 응원해 주는 방식.

그런 관계의 덜어냄이 오히려 우리를 견고하게 했다.


남편과 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서로에게 다정하지만, 굳이 모든 걸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가끔은 선천적으로 난청인 루나처럼

서로 가족에 대한 이야기 등 민감한 부분은 들어도 안들은척 하기도 한다.


비워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이 꽉 찬 세상 속에서 더 이상 비울 것이 없는 관계라니, 참 다행이다.


그리고 나는 시어머니께 해달라고 조르기 위해 체리파이 레시피를 정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