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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오네오 Aug 28. 2021

패스워드와의 전쟁

코로나 시대 나는 비번과 싸우고 있다.


퇴근을 하고 집에 오면 비교적 깔끔한 집이 나를 반긴다. 이 생각에 대한 남편과 나의 입장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아이들이 방에 컵, 밥그릇 몇 개 정도, 떨어진 잠옷이나 팬티 정도 있는 건 애교로 봐줘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라 크게 어질르지 않고 하루를 보내 주는 아이들이 늘 고맙고 기특하다.


근데...

그른데...

난 우리 집의 이러한 정리정돈이 위에서 아래로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몸에 밴 자연스러움인 줄 알았다. 퇴근길 발발이 울려대며 연신

 

"엄마 언제 와? 그러니까 딱 몇 시에 오냐고?"


물어보는 게 종일 엄마가 고프고 저녁밥이 고픈 내 아가들의 애달픈 기다림인 줄만 알았지 증거인멸 아니 우리 집 룰을 지키기 위한 다소 처절한 몸부림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번 주 예고 없는 한 시간 이른 퇴근을 통해 그동안 그~~ 다지 만족스럽진 않았던 집구석 컨디션이 그나마도 아이들이 나를 위해 꽤나 노력한 결과라는 걸 깨닫게 됐다.



뜻밖의 불시검문...
내가 있는 동안에는 집안에서 절대 볼 수 없는 낯선 풍경



"뭐 이만하면 깨끗하지!"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원격수업에 참여해야 하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나의 분노 포인트가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봤을지 또한 궁금하다.



어디 한 번 맞춰보시라! 나의 분노 포인트...



밥은 식탁에서 먹는 게 우리 집 국룰이야!

바스락 거리는 음식은 식탁 아니 접시 반경 안에서 먹는 게 국룰이야!

먹고  난 그릇은 씽크볼에 넣어 물에 담가놓는 게 국룰이야!


나 편하자고 만든 이 오조오억 개도 넘는 국룰을 지켜주고 있는 아이들을 한편 애잔해하며, 한편 고마워하며, 내가 없을 땐 다소 어기기도 할 것이란 너른 맘을 먹고 있는 '정리 이슈'가 아니라는 게 포인트이다.


※ 참고로 오늘 아들 데려간 치과에서 본 시사인에서 저 '오조오억'이란 말의 의미를 첨 알았고, 놀라웠고, 첨 배운 단어는 꼭 써먹어 보고픈 나의 도전정신에  삽입해 본 단어임을 밝히며, 내 사상에 대한 검증은 단어 하나보다는 앞으로 쓰일 길고~ 지루한 나의 글들을 통해 이뤄지길 기원하는 바입니다.



그렇다. 결혼 10년 만에 바꾼, 문을 열지 않고도 안을 다 들여다볼 수 있는, 심지어 휴대폰으로도 그 안을 감시할 수 있어 아이들이 내가 만든 간식을 꺼내 드셨는지 물어보지도 않고(물어보면 될 것을...) 파악이 가능한 스마트한 감격스럽게 스마트하게 나와 연결되어 있는 스마트 허브의 도움으로 유튜브와 한 몸 되는 행복한 점심시간(과연 점심시간만 함께 보내 것인지...)을 보내신 창의력 넘치는 아들 따님의 식사 포지션이 바로 퇴근길 나의 깊은 빡침의 포인트 되시겠다.


주말마다 청소하며 항상 의문이었다. 왜 늘 냉장고 앞에 바퀴 긁힌 자국이 있는가? 무거운 물건을 떨어트린듯한 마루의 흔적은 냉장고에서 그릇을 빈번히 떨어트려 생기는 것인가? 그러한 의문들이 저 포지션의 발견으로 안개 걷히듯 이해가 됨과 동시에...


코로나의 등장으로 원격수업을 하는 아이들과 시작된 나의 길고 지단 한 패스워드와의 전쟁이 다시 국지전으로 번지고 있다. 아예 와이파이를 끊어버리고 싶지만 이학습터와 줌수업 때문에 그럴 수 없으며 그것이 방법도 아닌 현실과 싸우는 중이다. 이 와중에 번번히 곳곳에 숨겨진 엄마의 통제 밖 전자기기를 찾아내는 창의적이고 집요한 내 아이들은 애잖하고 측은하기만 하니 이 또한 환장할 노릇이다.



번 비번 패밀리 허브 비번이 뭐더라?

아! 그래 남편 처음 만난 날... 따뜻하고 화사했던 08년 5월 어느 날, 합정동 2번 출구였지...

허나 이것도 털렸구나...

그나저나 이놈에 패밀리 허브 비번을 어떻게 바꾸는 거더라? 골치를 썩히며 남편을 불러댄다. 설정을 뒤져 찾아준 남편은 비밀번호는 내가 정하라 한다.


그래 내가 정해야지...

짜증 나는데 1818로 해버릴까? 안돼 그건 털렸을 때 아이들에게 넘 비교육적이야!

패스워드를 정하는데 왜 또 왜 이육사의 시  '절정'이 떠오르는 걸까?


           절정
                                                             이오네오

매운 바이러스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원격수업으로 휩쓸려 오다.

결혼기념일도 그만 지쳐 털린 패스워드
서릿발 칼날진 설정 앞에 서다.

어데다 비번을 옮겨 적어놔야 하나?
이 너른 집 애들 손 안 닿는 곳이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 밖에
패스워드는 전남친 생일로 귀결된 네 자리인가 보다.

 


이렇게 시작된 아이들과 나와의 패스워드 싸움은  총력전 게릴라전 국지전... 수시로 계속되고 있다. 나의 무기엑스키퍼, 패밀리링크 가리지 않고 다양해지고 있다. 이 와중에 마냥 없앨 수 없는 집안 전자기기의 잠금 비밀번호는 평일 낮 심심하고 무료한 아이들의 간절함으로 뚫리고 유튜브에 함락된다.

희한하게도 분노로 버무려 만들어 놓은 비번은 기억에서도 쉽게 지워진다. 바꿔놓은 비밀번호를 필요할 때 찾아내는 것 또한 전쟁이다. 패스워드도 아름다운 기억이나 아련한 추억이 깃들어야 오래오래 남는 법이다. 번번이 뚫린 태블릿, 노트북, 휴대폰 심지어 스마트 허브의 비번까지 고치고 바꾸다 보면 아름다울 새도 아련할 겨를 없는 사십 대 내 기억력은 총기 가득한 십 대들의 집념을 이기지 못하고 패배의 자리를 내주고 만다.



엄마 내 태블릿 비밀번호 힌트 JW는 무슨 뜻이야?


...

젠장 그게 재원이던가 준우던가?

에라이 둘의 전번이나 생일이나 둘 중 하나겠지...


그래도 아직 비번으로 쓸 아름답고 아련한 추억이 숫자와 이니셜로 존재하고 있어 나의 이 전쟁과도 같은 엄마살이에 요상하고 요긴한 도움이 된다. 지면을 빌어 잊히지 않아 아프던 이십 대의 추억이 지금껏 잊히지 않아 얼마나 큰 도움이 되고 있는지 그들의 이름과 폰 뒷번호 혹은 생일 하나하나를 부르며 감사하고 싶은 맘 간절하나...


그럴 수 없다.
그들은 내 글을 보아도 좋으나.,.
내 아이들은 이 글을 보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서투른 이십 대...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했었다면

지금은 그녀의 자녀들의 태블릿 P/W가 되었음을...

지금 웃고 있는 당신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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