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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오네오 Sep 05. 2021

이 망할 놈에 감칠맛

미원이 나댄 적이 있었나?


일요일 아침

콩나물 국이나 끓여볼까? 하고 팔을 걷어붙이는 나의 뒤통수에 남편의 말이 와서 꽂힌다.


미역국이나 소고기 뭇국 좀 끓여서 애들 아침에 먹게 해 줘.


우리 집은 일찍 출근해야 하는 내가 아침밥을 챙겨놓으면 아이들과 함께 등교, 출근하는 남편이 준비시키고, 챙겨 먹이고 정리하는 구조다. 평일 아침 식사 시간 서버(남편)와 셰프(나)가 이원화되어있는 우리 집 구조 때문에 남편의 주문이 디테일 해 질 때가 많다. 내가 만들어 내가 먹이면 밥투정하는 아이들 윽박질러 먹이든 포기하고 시리얼이나 먹이든 할 텐데 성실한 서버인 남편은 제공된 음식을 고객들이 먹지 않으면 기어이 셰프를 닦달해 고객들의 니즈를 수용하게 만드신다. 2학기 개학 이후 샌드위치 비비고 주먹밥 위주로 아침 먹는 게 짠했나 보다. (이렇게 나의 아침밥 보이콧 선언은 안드로메다로 가버렸다)


빈정이 살짝 상하려 하는 게 단지 나의 컨디션 탓이라 다스리며 오랜만에 우리 애들 좋아하는 미역국 한~ 냄비 끓여볼까~ 하고 있는데 아빠랑 찰떡궁합 자랑하시는 우리 따님께서 한 술 더 떠 주신다.


엄마! 어남선생 미역국으로 끓여줘!


어남선생 미역국의 감칠맛의 비밀은 먹다 남은 사과 반쪽


쉽고 간단한 어남선생님의 미역국 육수 감칠맛이 궁금하신 조 씨들께서는 류수영이 만드는 내내 간단하다! 20분 이내 완성! 뭐 이런 멘트들을 나한테 강조하신다.


나는 일단 국 한 냄비를 끓이는데 곰솥 두 개가 필요하다는 사실부터 마음이 답답해져 온다. 육수 내는 게 쉬운 일이란 어남선생이 자꾸 미워질라고 한다.


나는 육수를 큰 곰솥에 팔팔 끓여 소분해 얼려놓듯 그때그때 우려서 쓰든 여하튼 육수 내는 수고로움을 삶에서 자체적으로 생략한 지 꽤 되었다. 어느 해 집 앞 재래시장 잔치국수 맛집에 파는 멸치 육수 농축액을 발견해 그걸로 국, 찌개를 만든다. 그 소중한 국숫집 농축 육수를 영접한 이후부터 우리 집은 국, 찌개, 전골, 샤부샤부 등등 각종 국물요리 유명 맛집이 되었다. 내  요리의 팔 할은 그 국숫집 육수가 책임진다. 아마 그 육수 때문에 나는 이사도 못 갈지 모른다. 나뿐 아니라 내 사랑하는 친구들에게도 국숫집 육수는 삶의 효율성을 돕는 꿀팁이 되어가고 있다.


내 비법 감칠맛은 내 삶을 고단하게 만들지 않는 선에서 가족의 인정을 받고 있다. 어남선생보다 바쁜 내가 어남선생만큼의 노하우는 갖고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일들을 알 리 없는 나의 아기새들이 지지배배 나에게 어남선생의 육수를 배워보라 강요하고 있다.


미역반 고기반 그리고 사과대신 매실액 한 숟갈


뭣도 모르는 딸내미에게 한수 가르쳐주고픈 맘 간절하나, 어찌 보면 나라는 딸년도 내 딸과 같은 짓을 엄마에게 하고 살았다는 생각이 입을 다물게 된다. 사과 들어간 어남 선생 미역국의 감칠맛을 궁금해하는 딸을 위해 매실 한 숟갈 넣었으니 사과 넣고 끓인 척해야겠다. 엄마가 하는 말 중 가장 싫어했던 말이긴 한데...


그게 그거지 뭐...


나대지 않고 팬트리 저 안쪽에서 엄마의 식탁을 지켜준 MSG


어떻게 애들 먹는 음식에 인공 조미료를 쓸 수 있어?

세상 암이란 암은 다 '다시다'때문에 걸리는 냥 유난을 쳐 떨며 인공조미료 쓰는 엄마 비난하던 딸들 덕에 울 엄마들의 주방에 눈에 띄는 명당을 차지하고 있던 미원, 다시다가 사라지진 못하고 찬장 저 깊은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나는 알고 있다. 인공 조미료 든 음식은 절대 안 드시는 울 시어머니도 주방 찬장 어디에 다시다 하나쯤은 숨겨두신다. 도대체 뭐하러 다시다 같을걸 쓰냐며  유난을 떠는 남편과 아가씨를 배려한 조용한 후퇴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어머님은 나에게만 조용히 말씀하신다.


그래도 다시다가 조금 들어가야 하는 음식이 있어.



지금은 자신의 워라밸을 위해 비법 조미료 하나쯤은 쓰고 살고 있는 가사독립군 하지만 안티 미원 군단들!



내가 사랑하는 한 주부 카페에는 요즘 동전 육수의 인기가 한창이다. 천연조미료의 농축이라 우기는 이 간편한 감칠맛이 진짜 다시다, 미원 보다 많이 건강한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삶의 편의를 위해 동전 조미료를 개시했다면 미원을 폄훼하며 엄마의 워라밸을  외면했던 무지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자꾸 엄마에게 사과할 일이 많아지는 게 어른이 되어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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