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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안 Dec 27. 2020

'그런데'의 마법

평소 그렇지 않던 이가 함께 커피를 마시자고 하면 소소한 이야기를 하자는 뜻은 아닌 것이다.

그 상대가 같은 직장 동료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최소한 내 경험 안에서는...


잠시 커피 하자던 후배와 커피 하나씩 들고 마주 앉았다.

날씨 이야기와 코로나 이야기를 거쳐 짐짓 정색한 후배가 말을 꺼냈다.


"선배, 나 이렇게 살려니 너무 힘들어요. 대출이자 갚고 나면 생활이 너무 힘들어요. 일도 맞지 않는 것 같구요. 여기 때려치우고 할 거 없을까요?"

평소 조용했던 후배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다니 꽤나 힘들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알고 지내던 형이 대표로 있는 업체에서 사람을 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넌지시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런데 선배, 거긴 사장이 일 빡세게 시키잖아요. 게다가 대전이라 이사도 가야 하고요? 중소기업이라 연봉을 많이 준다 해도 좀 그렇네요."


완곡한 표현이긴 했지만 분명한 거부의사였다.

그리고 나의 예전 사수가 임원으로 있는 외국계 회사에 지원해 보는 것은 어떤지 물어보았다. 원한다면 자리가 있는지 여쭤보고, 추천 정도는 부탁드려보겠다고.


"그런데 선배, 저 영어 잘 못하는 거 알잖아요? 게다가 그쪽은 집값이 비싸기로 유명한데... 외국계라 고용도 불안하고요..."


완곡하긴 했으나 이또한 분명한 거부의사였다.

이번에는 내가 도와줄 방법은 없으나 최근 많은 인원이 이직한 근처 회사로의 이직을 권해보았다. 필요하다면 이직한 사람들에게 정보를 구해보겠다고.


"그런데 선배, 거기나 여기나 별 차이 없잖아요. 연봉도 비슷하고... 그럼 굳이 거기로 갈 필요 있을까요?"


흠.... 마음속으로 잠시 숫자를 센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답답함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면 팀을 옮기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내가 당장 가진 정보는 없지만 일이 맞지 않는다면 적절한 일이 있는 팀을 같이 한 번 알아보자고 했다.


"그런데 선배, 사실 제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그렇게 옮긴다고 해서 그쪽 일이 잘 맞을 거라는 보장도 없구요."


하... 이번에는 조금 더 큰 숫자를 마음속으로 센 후 입을 열었다.

일이 힘들고, 삶이 팍팍해져 간다면 지금이라도 맞는 일을 한 번 찾아봐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이렇게 있으면 상황은 점점 좋아지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선배, 선배랑 나랑은 처지가 다르잖아요. 선배는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하고 싶은 일하면서 돈을 벌 수 있으면 나도 그렇게 하고 싶죠."


딸린 식구도 더 많고, 나이도 더 많은 내가 어떤 면에서 더 나은지 알 수는 없었지만, 후배는 나와 자신은 다르다고 했다. 어떤 면을 바라보고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내가 해 줄 말이 없었다.


'그런데'라는 말에 질려버린 내가 감정을 잡지 못할까 봐 다시 마음속으로 매우 긴 숫자를 세고 입을 열었다.


네가 생각할 때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이 뭐가 있는지 이야기해 줄 수 있냐고, 그러면 그것들을 한 번 같이 고민해보자고 했다.


"제가 뭐 할 수 있는지 알면 선배한테 물어보질 않았겠죠... 하... 정말 답이 없네요. 너무 답답해요."


눈 앞에 놓인 남은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데'에 맞아 나의 기분은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결국 나는 후배와의 대화를 포기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후배는 끊임없이 '그런데'라는 연결고리로 다음 생각을 끌고 왔다. 그는 다른 사람들도 '그런데'라고 말할 수많은 이유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런데'로 시작되는 '안 될 이유'는 오직 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을 내리고 변화에 따르는 것이지, '그런데'라고 할 이유가 없어서 하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는 마법의 단어이다.

모든 의욕과 긍정을 꺾어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마법의 단어이다.

'그런데'라는 마법의 단어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의욕과 긍정을 되살려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두 마법의 단어 중 어느 것을 사용할지는 스스로에게 달려있다.

이런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런데'를 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더 길어서 말하기 어려워서 그런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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