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단상

몸에 예민함의 스위치를 켜는 시간

by 진심과 열심

올해 네 번째 책을 마감했다. 두세 달 간격으로 마감하는 생활을 한 지 꽤 됐는데 아직 수련이 덜 된 걸까? 여전히 마감하는 주가 되면 나도 모르게 긴장하게 된다. 마치 다른 몸이 된 것처럼 내 몸에 예민함의 촉수가 새로 달린 느낌이다. 보이는 영역도, 느끼는 감정의 진폭도 크다. 이 예민한 감각도 이제 곧 사라질 테니 이번에 마감을 하며 내게 짙게 기억된 순간들을 기록해두려고 한다.


둔감한 나에서 예민한 나로

언제부턴가 하는 연습이 있다. ‘다른 사람의 표정을 읽으려 하지 않는 거’다. 누군가의 불편한 표정을 볼 때면 여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든다. 내가 뭐 잘못했나? 뭐 힘든 일이 있나? 나를 싫어하나?…. 한번 이런 생각에 빠지면, 기정사실인 것처럼 깊은 오해를 하고 만다. 그래서 생존본능처럼 둔감함의 스위치를 켜고 살고 있다.

그런데 마감 때는 평소보다 몸이 피곤하고 신경도 날카로워지기에 내 눈빛이나 말이 누군가를 의도치 않게 다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평소보다 유해지자, 부드러워지자 하고 틈틈이 의식적으로 다짐한다.

반대로 누군가의 말이 내게 큰 파동을 몰고 올 때도 있다. 평소라면 그냥 아무렇지 않게 흘려들었을 말이 더 깊은 자극으로 다가온다. 이번 마감 때도 그런 순간이 있었고 결국 점심시간에 눌러두었던 감정이 툭 터지고 말았다. 오랜만에 회사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내 자리에 칸막이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고마움이 증폭되는 순간

이런 예민해진 감정에도 장점이 있다. 좋았던 순간이 더 선명하게 기억된다는 거다.

이번 책을 만들며 큰 실수를 했다. 본문 인용이 많은 책이었는데, 허가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마감을 며칠 앞두고 있을 때 이 사실을 알게 됐고 그제야 여러 출판사에 허가 요청 메일을 보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마음을 졸였는데, 내 바쁜 마음을 동병상련으로 느끼셨는지 많은 분이 빠르게 답변을 주셨다. 게다가 생면부지의 나에게 “책 편집하시느라 노고가 많습니다”, “모쪼록 무사히 마감 치르시길 바랍니다”,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라고 다정한 말 한마디씩을 덧붙여 보내주셨다. 늘 경쟁인 업계라고 생각했는데, 따뜻한 마음들을 받았다. 덕분에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마감하는 주에는 매일 디자이너님께서 본문과 표지를 수정해주셨는데, 다음 날 아침 9시쯤에 도착해 있는 디자이너님의 수정 파일이 하루를 시작하는 큰 힘이 되었다. 내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확보해주시려는 배려다. 또 밤늦은 시각 “오늘도 정말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와 있는 작가님의 회신 메일이 하루를 뿌듯하게 마무리하게 해주었다.

또 한 가지 고마웠던 일은 인쇄 사양을 확정하기 위해 미리 샘플 교정을 내야 하는데, 인쇄 교정 업체에 여분 종이가 없어 다음 날 인쇄물이 나오면 퀵 기사님을 통해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아침부터 언제 퀵 기사님을 불러드려야 할지 신경이 쓰였는데, “급하신 것 같아 종이가 생겨 먼저 해드렸다”는 인쇄 교정 업체 사장님의 연락을 받았다. 출근하니 내 자리 위에 인쇄 샘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교정 업체 사장님께서 써주신 마음에 든든한 응원을 받았다.

이외에도 예상치 못했던 동료의 깜짝 방문, 굶지 말라고 사다준 김밥과 빵, 마감 즈음에 먹었던 다정한 점심이 무척 즐겁고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감정이 무너지던 날, 우연히 퇴근 시간이 맞아 선배가 나를 집에 데려다주며 함께 배 아플 정도로 웃으며 퇴근하던 길 심각했던 마음이 아무렇지 않게 가라앉았다. 이 모든 온기들을 받아 무사히 마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 혼자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치밀한 마감 설계자 되기

이번에 마감을 하며 가장 크게 배운 건 많은 사람을 이끌어야 하니, 모두가 덜 스트레스를 받도록 내가 일정을 더 잘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책을 작업할 땐 원고를 수정하느라 초반부에 많은 시간을 썼고, 그러므로 제목 확정이 늦어졌고, 표지 시안 역시 살짝 늦어지며 이렇게 작은 틈들이 벌어져 후반부엔 나도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급하게 만들었다. 미리 앞서 걱정을 하지 않고, 계획을 정밀하게 세우지 않는 성격인데, 일할 때는 일상과 달라져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번엔 변수 값을 고려하지 않고 일정을 세운 게 가장 큰 문제로 작용했다. 한편으론 변수를 어디까지 예상할 수 있을까 하는 헛헛함도 밀려온다. 인쇄 샘플을 보고 안심하고 인쇄 감리를 갔는데, 실제 인쇄 때는 인쇄 방식이 달라 페이지 전체에 컬러가 들어가는 부분이 살짝 희끗희끗하게 나왔다.

모든 변수를 다 고려할 순 없고 막진 못한다고 해도 다음번에는 ‘변수의 시간’을 추가로 계산해 일정표에 넣자는 교훈을 얻었다.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안심하게 만드는 치밀한 마감 설계자가 되고 싶다.


마감일 기록

마지막 한 교를 더 보자는 욕심에 전날 10시 반쯤 회사에서 퇴근했고, 길게 늘어선 버스 대기 줄을 기다릴 엄두가 나지 않아 오랜만에 야근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집에 와서 조금 더 교정을 보다가 잠들었고 긴장해서인지 새벽 4시에 눈이 떠져 교정을 보다가, 새벽 5시에 아이들 산책을 하러 가는데 이 시간까지도 달이 떠 있었다. 새하얀 둥근달이었다. 평상시처럼 아이들 산책을 마치고, 줄넘기도 완수하고, 아이들이 밥을 먹는 잠깐의 시간에도 교정지를 보았다.

아침에 일찍 디자이너님께 교정지를 넘기기로 했으니, 버스보다는 운전이 빠를 거라는 생각에 운전하며 출근하는 길에 고양이 새끼보다 작은 한 생명체가 로드킬 당한 걸 발견했다. 회사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산콜센터에 신고하고 그렇게 오늘 실수 없이 마감을 해내야만 하는 내 자리에 경건한 마음으로 앉았다. 디자이너님과 여러 번 수정 메일을 주고받으며 오후 6시를 조금 넘겨 인쇄소에 오케이 연락을 드렸다. 여러 인쇄물로 어질러진 책상을 정리하고, 디자이너님과 작가님께 마감 인사를 드리고, 책 프로젝트에 최종 파일을 올리고, 잠깐 내 얼굴을 보러 온 선배와 회사 후문에서 5분 동안 담소도 나누고 8시쯤 퇴근했다.

놓치면 14년 뒤에야 볼 수 있다는 ‘슈퍼 블루문’이 뜬 날이었고 집에 다다라서 달구경을 하자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아침 달과 저녁달 모두를 보았다.


마감한 다음 날 아침 아이들 산책할 때 만난 '슈퍼 블루문'. 예민한 스위치가 몸에 장착돼 있을 때면 모든 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가온다.


이번에 작업한 책의 커다란 주제 중 하나는 ‘성장’이었는데, 이번 책을 마감하며 나도 한 뼘은 성장했다고 느낀다. 언젠가 해보고 싶었던 디자인 요소도 책에 담아봤고, 이전 책들에 비해 적극적인 편집을 시도해보았다. 마감 데이터를 올리는데 심장이 쿵쿵 떨렸다. 오랜만에 수험생이 된 듯한 떨림이었다. 내게 장착된 이 예민함의 스위치는 이제 또 한동안은 사라질 테다. 이 마감의 기분을 잊고 곧 있을 마감에서 또다시 헤매고 있을 내가 언젠가 이 기록을 보고 힘을 얻으면 좋겠다.

+

이번 마감에서 기뻤던 일 또 하나는 감리 갔을 때 이전에 ‘일터의 장인’이라고 생각했던 인쇄소 기장님을 다시 만난 것이다. 우연히도 이번 책의 표지와 띠지를 담당해주셨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무척 반가웠다. 이번에 기장님은 편안하고 자신만만한 얼굴이셨다. 표지와 띠지도 색감이 완벽해서 한 번에 이걸로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거듭 마감을 하며 느끼는 건 기장님처럼 나부터 내 결과물에 자신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려면 부단히도 갈고닦아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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