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 희망, 기쁨, 사랑이 건네준 능력
며칠 전 아침 일어난 소소한 에피소드다. 인대파열 되었던 발목이 차츰 나아져서 다시 줄넘기를 해오고 있다. 출근하기 전에 아파트 단지 한적한 곳에서 줄넘기를 하고 있는데 할머니와 한 강아지가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나를 지나가겠거니 싶었는데, 나와 가까워진 강아지는 방향을 틀어 스스럼없이 나를 향해 직진해 왔다. 당황한 보호자분은 강아지가 나에게 오지 못하도록 산책 줄을 잡아당기셨다.
보호자분께 개를 좋아한다고, 그러니 괜찮다고 표현하기 위해 “안녕?” 하고 강아지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보호자께선 조금 안심하신 것 같았다. 강아지가 내 코앞까지 다가오자 강아지에게 손등을 내밀었다. (언젠가 동물병원 간호사님께 배운 기술로, 함부로 쓰다듬지 않는다.) 그러자 강아지가 주의 깊게 내 냄새를 한참 맡았다.
이런 광경을 처음 보셨는지 보호자분께서는 어리둥절해하셨다. “제가 개 키우는 사람이라서 그런가 봐요”라고 말씀드리자, 보호자분께서는 “어머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를 충분히 파악한 후 떠나려는 강아지에게 “잘 지내”라고 인사해주었다. 그렇게 줄넘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려는데, 갑자기 마음 한편이 몽글몽글해졌다. ‘샤워를 해도 나에게는 개 냄새가 나는구나. 내게 우리 네 마리의 존재가 짙게 배어 있구나’ 하고 느꼈기 때문이다.
강아지가 나를 향해 걸어왔을 때 ‘아, 이 아이는 내가 누군지 아는구나!’ 하고 나 역시 이미 느끼고 있었다. 강아지가 우리 ‘희망이’와 똑 닮은 촉촉하고 아련한 눈빛을 하고 내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 강아지를 처음 보았지만 이날 우리는 서로 교감했다.
개를 키우면서 가장 경이로웠던 건 동물과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같은 언어를 구사하지 않아도, 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원하는 바를 알 수 있다. 눈빛과 마음만으로도 어떤 생각의 추측 과정 없이 직관적으로 선명하게.
‘언어’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생각이나 느낌을 나타내거나 전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음성·문자·몸짓 등의 수단”이라고 나온다. 문자는 사용하지 않지만, 음성으로 몸짓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우린 서로 언어가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어렸을 때 “언어는 인간만이 가진 독특한 것이다”라고 배워왔다. 지금도 지식백과 사전에 이렇게 적혀 있다. 아이들을 반려하면서 가장 크게 의문이 생긴 점도 이 부분이다.
개들은 분명 말을 한다. 개들이 하는 모든 말을 알아듣진 못하지만, 몇 가지의 음성언어를 이해한다. 실외 배변을 하는 소라가 “나 급해요”라고 다급하게 요청하는 말, 산책할 때 “저기 좀 더 가보면 안 될까요?”라고 제안하는 말, 아침에 처음 만났을 때 “미치도록 반가워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라고 건네는 사랑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특히 소라가 실외 배변을 요청하는 소리는 내 귀에 더 예민하게 들려서 문을 닫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어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
음성언어 외에 몸짓언어는 더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다. 희망이는 내가 자신을 충분히 만져주지 않았으면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나를 향해 머리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자신을 쓰다듬어 달라고 적극적으로 의사 표현을 한다. 내게 받은 사랑이 충족되어야만 자리를 뜬다. 그리고 아이들은 산책을 멀리 갔을 때 목이 마르면 가던 길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이 정도만으로도 단번에 ‘목이 마르는구나. 물 줄게’라고 상황 판단을 할 수 있다. 만약 내가 이해하지 못했을 때는 더 적극적으로 코로 내 무릎을 콕콕 친다. 그리고 서로 장난을 치고 싶거나, 아니면 나에게 장난을 걸고 싶을 때면 귀를 뒤로 젖히고 자세를 낮추며 눈빛은 살짝 상기된 채 타이밍을 살피며 차츰 다가온다.
깊이 교감하는 사이여야만 이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아니다. 아이들은 모두가 알아차릴 수 있게 분명하게 적극적으로 말한다. 소라가 아이들을 출산했을 때 한겨울이라서 배변 패드를 깔아줬는데, 소라는 거기에 소변만 누었다. 그러곤 엄마와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웠던 출산 셋째 날, 소라가 아빠를 졸졸 따라다니며 아빠 무릎을 코로 콕콕 찍었다고 한다. 그래서 평소 소라와 교감이 덜하고 소라의 언어를 잘 모르는 아빠도 ‘배변이 급하구나’ 하고 단번에 아셨다고 한다.
해외로 입양 가는 개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면, 슬프면서도 한편으론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낯선 공간에 적응하고 또 새로운 사람들과 어우러져야 하기 때문이다. 나라면, 인간이라면 이 어마어마한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은데 개들은 결국 해낸다. 그렇게 누군가의 마음속에 커다란 영역으로 자리하게 된다.
다른 문화의 언어를 익히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람과는 달리, 개들은 세계 각지에서 모두와 통할 수 있는 ‘언어’를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 언어의 중심에는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와 마음 그대로 표현하기’가 있다. 품종을 막론하고 개들끼리도 서로 언어가 통하고, 세계 그 누구와도 통하니 어쩌면 개들이야말로 ‘만국어’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또 개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언어를 구사할 수 없다고 판정하는 건, 지극히 인간의 관점이다. 우리가 그들의 언어를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언어라고는 모국어인 한국어 외에 생존 영어 정도밖에 없었는데 아이들 덕분에 구사할 수 있는 언어가 하나 더 늘었다. ‘개국어’다. 꼭 반려견을 키워야만 ‘개국어’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이들이 하는 것처럼 ‘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면’ 된다. 해보면 알 수 있다. 이 언어가 얼마나 투명하고 다정한지. 꼭 같은 말을 해야만 언어가 통하는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