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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omestories Dec 13. 2020

밴쿠버에서 산다면 2

여행자의 사유법

덤으로 얻은 약간의 용기를 가지고, 밴쿠버에서 사는 여행은 계속된다. 

골목 골목을 다닐수록 감탄한 것은 빈티지가 얼마나 그들의 삶에 익숙한 것인지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될 때였다. 주거지가 있는 작은 동네라면 상점 몇 개가 있는 골목이라도 자연스럽게 빈티지 가게가 들어서 있다. 동네주민들의 상품을 위탁받아 판매하는 가게는 잘 정리되어 있지는 않지만 정겨움이 가득하다. 빈티지 상품과 로컬 브랜드의 상품들을 적절하게 섞어 편집숍처럼 근사하게 세팅한 가게들은 눈도 즐겁고, 내가 아는 범위 이상의 빈티지를 소비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어 감동으로 다가온다. 물건이라는 것이 어떤 위치에 어떤 연출로 두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또 한 번 느끼며 사용자의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느낀다. 이렇듯 빈티지가 잘 녹아든 삶의 방식과 태도가 어떤 소비 방식보다 우아하게 느껴졌다. 


이 중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지인의 추천으로 알게 된 정기적으로 열리는 대규모 빈티지 프리마켓이다. 밴쿠버는 지역마다 프리마켓이 열리는데, 규모도 크고 다양한 사람들이 판매자로 참여한다. 특히 상점을 여는 것이 행정적으로 까다로워서 이런 빈티지 프리마켓을 통해 고객을 만들고, 브랜딩이 어느 정도 형성되면 그때 가게를 오픈하는 경우가 많아 자신만의 가게를 꿈꾸는 사람들의 등용문 같은 곳이라고 했다. 입장료 3불을 내고 들어가면 수십 명의 판매자가 재기발랄한 진열 방식으로 자신만의 판매 구역을 이루고 있다. 햇살이 좋은 날이라 친구, 가족들과 함께 나들이 삼아 나온 사람들의 기대 가득한 발걸음을 따라 나도 한 걸음 보탠다. 보통 풀리 상점 하면 무료로 구경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소액의 입장료를 받는 시스템이 맘에 들었다. 외진 곳에 부러 찾아와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서 볼 정도의 가치가 있는 마켓이라는 의미이니 말이다. 각양각색의 아이템을 둘러보면서 커다란 마켓을 한 바퀴 돌면 시간이 금세 지나간다. 쇼핑하며 지친 몸은 한편에 마련된 바에서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하는 것으로 기운을 북돋울 수 있게 되어있다. 빈티지라는 카테고리로 열리는 프리마켓의 형태가 신기하기도, 부럽기도 했다. 


국내에도 몇 년 전부터 프리마켓 형태의 유통 플랫폼이 성장하는 추세다. 블로그마켓을 통해 생필품을 소개하다 점점 규모가 커진 띵굴마켓이 대표적이 예고, 패션커뮤니티 기반으로 성장한 스타일쉐어의 마켓페스트, 10대들의 놀 거리 문화를 위해 만들어진 러블리마켓 등 다양한 타켓과 카테고리를 기반으로 한 크고 작은 프리마켓이 있지만, 아직 알려진 빈티지 프리마켓은 없다. 수요가 있어 플랫폼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기발한 플랫폼을 통해 수요가 생겨나기도 한다. 한국에도 빈티지가 이런 자연스러운 문화로 받아들여지고, 그런 수요를 만들어내는 플랫폼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다는 포부가 생겨난다.


빈티지 프리마켓을 통해 앞으로 만들어 나갈 플랫폼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데 도움을 얻었다면,  플랫폼을 어떤 이미지로 구현할 것인지에 영감을 받은 장소도 있다. 영감은 생각의 끈을 놓지 않으면 항상 찾아오는 것이라 많은 장소에서 도움을 받았지만,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에 혼쭐이 난 곳이 있다. 밴쿠버에 가기 전부터 SNS로 눈여겨 본 가게가 있다. 피드만 본다면 빈티지 가게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통일감 있는 이미지로 가득 차 있어 꼭 가 봐야지 리스트업 해 둔 상점이다. 한 번은 휴무, 한 번은 주인의 자리 비움, 삼고초려 끝에 드디어 오픈된 가게에 방문했다. 그 이름도 남다른 “Hey, Jude”는 디자이너 브랜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행어에는 파스텔과 뉴트럴 톤의 아이템을 컬러 그라데이션으로 걸어두었고, 옷에 딱 맞는 가방, 벨트 등을 사이 사이에 두어 통일감을 살렸다. 트윌 코튼 소재로 상점 이름을 넣은 메인 라벨을 만들어 모든 아이템의 택을 변경해둔 것도 통일감에 한몫을 하고 있었다. 벽을 두른 선반과 중앙의 빅테이블에는 빈티지 오브제와 로컬 브랜드의 향초, 오일, 액세서리 등을 배치하고, 은은하게 피어나는 기분 아로마 향은 빈티지 냄새로 대변되는 습도를 머금은 꿉꿉한 냄새에 대한 기억을 싹 지우고, 좋은 향으로 기억을 덧씌워준다. 잘 갖춰진 편집숍의 인테이리어와 디스플레이를 가진 스무 평 남짓한 공간은 본인들이 전하고 싶은 일관된 이미지로 꽉 차 있어 공간 이상의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빈티지를 좋아한다면서도 그에 대해 가지고 있는 낡고, 어수선한 고정관념이 한 번에 깨지는 순간이었다. 아,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소개할 수 있겠구나.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없구나. 나름대로 계속 새로운 것을 찾고, 관념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에 익숙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굳은 믿음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빈티지에 대해 예전의 나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만들 가게를 통해 지금의 나처럼 생각이 바뀌는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다. 긍정적이지 않은 고정관념을 좋은 경험으로 바꾸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한가.



온라인에서 넘치도록 상세하고 많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래도 여전히 현장이 가지는 힘은 온라인의 것과 비할 바가 못 된다. 그 장소에 가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의 미묘한 차이에서 오는 깨달음은 막연히 글과 사진으로 더듬으며 짐작하던 것과는 결이 다른 인사이트가 된다. 발품 팔아 돌아다니며 두 다리로 넓힌 세상은 나의 지경을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게 넓혀준다. 길어봤자 이 주 남짓의 기간을 꽉 채워 바쁘게 돌아다니던 휴가와 다르게 느린 호흡으로 일상을 자세히 조명해보는 여행의 방식은 지나칠 수 있는 것들도 톺아볼 수 있는 여유와 관찰력을 선사한다. 일상에서 나를 떼어내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던져두고, 그곳에서 새로운 자극을 받아 차곡차곡 사유의 시간을 더해가는 것은 여행이 주는 많은 선물 중 하나다. 


물리적, 시간적 여유가 허락하지 않을 때에도 나는 이 여행사유법을 간혹 사용한다. 살고 있는 서울이라도 가보고 싶었던 장소를 지도에 표시해두고 하루를 여행자처럼 돌아다니는 거다. 가보지 않은 동네거나, 설사 익숙한 동네라도 여행자의 마음가짐으로 돌아보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다. 흘려보냈지만 처음처럼, 설핏 알았지만 이제야 다시, 익숙하지만 다르게 생각되는 것이 보인다. 여행자의 시각으로 낯선 만큼 보이는 세상이란 익숙한 장소도 설레게 하는 마법 같은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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