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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omestories Dec 09. 2020

밴쿠버에서 산다면 1

문 열 힘만 있으면 됩니다.

공항의 공기에는 언제나 설렘이 옅은 분자처럼 흩어져 있다. 일행을 동반한 비행은 설렘이 더 진하고, 혼자 타는 비행은 설렘에 묘한 쾌감이 동반된다.


회사에 퇴사를 말하며, 가장 먼저 정한 퇴사 이후의 일정은 퇴사 기념 여행이었다. 9년간 쉼 없이 일한 나에게 주는 보상이자, 남몰래 가졌던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밴쿠버 한 달 살기를 떠나기로 했다. 마침 동생이 밴쿠버에 살고 있어 혼자 떠나는 여정도 부담이 없었다. 여행 동안 빈티지숍 오픈을 위한 아이템을 사는 것도 목표도 두기로 했다. 사면서 사는 여행이랄까.


사월의 밴쿠버란 푸른 하늘과 겹벚꽃의 진한 핑크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시기다. 쉬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지만 바잉을 하겠다는 목표가 생기자 바지런히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몇 차례 밴쿠버를 다녀간 경험이 있어서 빈티지숍이 많고, 다양한 형태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가능한 효율적인 동선을 위해 체류 기간 지역을 나눠 다닐 가게를 리스트업 하는 일이 중요했다.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유명한 가게를 구글 맵스에 표기해서 리스트업 하고, 그 지역에 vintage shop을 검색해 나오는 모든 가게를 표시해두는 방식으로 리스트업 했다. 구역에 따라갈 수 있는 동선을 나누니 꽤 바쁜 한 달이 될 것 같았다.



제일 처음 방문한 곳은 올드타운으로 밴쿠버의 명물이라고 불리는 증기 시계가 증기를 내뿜는 시간쯤 관광객들이 북적거리는 언제나 활기 넘치는 동네이다. 중심지인 만큼 각양각색의 빈티지숍들과 앤틱숍들이 많아 첫 시작으로 아주 좋은 지역이다. 하지만 조심하시라. 지독한 길치로서 구글맵에 의존하는 것이 최선이기에 가고 싶은 가게들을 표기해서 걸어가다 보니 아뿔싸, 어느새 거리가 홈리스와 그들 사이의 장물 거래가 이뤄지는 프리마켓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관광객 차림새는 나뿐이라 이마에 식은땀이 삐질 나는 상황이었다. 이미 가려는 길 한중간까지 와있어 돌아가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라 앞만 보고 경보 선수처럼 걸어서 다음 가게에 당도했다. 알고 보니 그 거리는 항상 홈리스들이 가득한 곳이라 일반인들은 도보로는 거의 가지 않는 곳이었다.


아찔한 첫날의 경험에도 수확은 있었다. 바로 용기를 가질 것! 시가지의 빈티지숍들을 다녀보니 유명하고 팬시한 숍들은 당연히 예쁜 것도 많고, 쇼핑하기에도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빈티지 특성상 한 스타일에 재고가 하나뿐이니 가능한 많은 상품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데, 겉에서 보기에 어둡고 선뜻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는 오래된 가게들에 보물이 숨겨져 있었다.


초행길에 일행도 없이 혼자, 창살이 덧대어 있는 창문을 통해 봐도 무뚝뚝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주인인, 구글맵에도 정보가 거의 없는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다. 여행객으로 왔다면 절대 가보지 않았겠지만, 나는 한국에서 온 보부상으로서 소임을 다해야 했다. 어색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 혼자 조용히 흘러왔을 시간만큼 꽉 차 있는 행어와 천장까지 빼곡하게 걸려 있는 벽면의 옷들을 살핀다. 둘 곳 없어 쌓아 둔 것인지 그 나름의 멋까지 느껴지는 선반에 가득한 아이템도 샅샅이 살핀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신중하게 가게 곳곳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동양에서 온 여자(애석하게도 가녀리지는 않다.)에게 주인 할아버지는 그제야 말을 건다. “이 재킷 정말 멋지네요.” “응, 그거 70년대 거야. 거의 오십 년이나 된 거라고. 근데 상태가 아주 좋지? 여기로 와봐. 여기 더 있으니까 이것도 보라고.” 몇 번의 대화가 오가면 무뚝뚝했던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계산대 뒤의 진열창에서 희귀한 아이템들을 아낌없이 꺼내 보여준다. 아이템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주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다. 한국에 가면 좋은 컨텐츠가 될 것이다. 몇 가지 아이템을 고르고 판매하기에도 괜찮을 구매가격인지 고민을 하고 있으면 말하지 않아도 계산기에 할인된 가격을 적어 보여준다. 역시 인사가 만사다. 당연하지 않은 곳, 평소라면 가지 않을 곳의 문을 밀 힘 정도의 용기만 있으면 생각보다 더 좋은 여행이 될 것 같다.



한 뼘의 용기. 우리 삶에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안 될 거라는 생각에 포기하고 싶어지는 순간에 한 번 더 시도해보는 것, 당연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도전해보는 것, 거창한 용기가 아니라 문을 열 수 있을 정도의 용기만으로도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면 그 문 뒤에 실패가 있더라도 한 번쯤 내 볼 가치가 충분하다. 내일은 또 어떤 문을 열게 될까 궁금하다.


귀여워서 괜히 넣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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