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지의 이상과 현실
20대 초반. 별로 따질 것도 없었고 무작정 여행이 떠나고 싶었던 시절의 철부지는 떠남에 있어서 돈 외에는 고려대상이 없었다. 뭘 몰라서였거나 혹은 정말 상관없어서였거나. 이유가 뭐였든지 간에 무엇보다 떠남 자체가 중요했으니까. 그러나 점점 더 많은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면 여행에서 날씨의 요정님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심지어 날씨 덕분에 어떤 도시를 최고의 여행지로 혹은 최악의 여행지로 기억하기도 하니 말이다.
여행지도 더 아름다운 때가 있다.
여행지도 우리의 시절처럼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지만 그래도 특히 더 아름다운 계절이 있다.
이 교훈을 깨달은 뒤로는 휴가를 계획하고 있는 달에 최적의 날씨인 여행지를 우선 후보로 둔다. 우기나 태풍이나 이런 자연현상을 최대한 피해서. 물론 이렇게 좋은 계절에 간다고 해서 항상 좋은 날씨를 만날 수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확률은 높일 수 있으니!
어쩌다 보니 유럽 여행을 대부분 춥디 추운 한겨울에 다녀왔던 본인의 경험을 빌려 유럽의 겨울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보았을 이 사진. 계획 없이 떠난 유럽 여행에서 우연히 이곳을 본 뒤로 일정이 꼬여도 좋으니 무조건 여기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이 국립공원은 실제로 영화 아바타 판도라 행성의 모티브가 된 곳이기도 하다.
바닥까지 훤히 보이는 에메랄드빛 호수와 초록 초록한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사진 속의 국립공원에는 정말로 요정이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바보같이 이곳에는 계절도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은 간과한 채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가. 겨울에 가면 플리트비체는 이런 모습이라고!!!!!! 1월의 플리트비체는 사진 속의 푸르른 모습은 사라지고 황량함 만이 남아있었다. 차라리 눈이라도 펑펑 내리면 설경이라도 볼 수 있겠건만. 쾌청한 날씨 덕분에 오히려 앙상한 나뭇가지만 더 잘 보일 뿐이었다.
이 곳에 대한 기억이 좀 더 강렬했던 이유는 단지 추운 날씨뿐만 아니라 해가 일찍 지는 바람에 중간에 길을 잃고 휴대폰과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며 간신히 빠져나왔던 기억 때문이기도 하다. 나 빼고 이곳은 겨울에 오면 안 되는 걸 알았는지 관광객은 보이지도 않고, 일몰 시간을 고려하지 못하는 바람에 이런 난처한 상황이 일어났다. 핸드폰 로밍도 안 해 갔었던 터라 이 큰 국립공원에 갇힐까 봐 얼마나 무서웠던지!
그래도 장점은 있다. 마치 포토샵으로 지운 것처럼 풍경 사진에 사람들이 한 명도 없다는 점.. 그리고 비수기 덕분에 따로 숙소 예약 없이 싼값에 머물 수 있다는 점...?
많은 여행객들에게 친숙한 리스본이나 포르투 말고 라고스라는 생소한 도시를 일정에 넣게 된 것은 어디선가 본 "유럽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휴양지"라는 글귀 때문이었다. 유럽에서도 남쪽에 위치해 겨울에도 상대적으로 온화한 날씨를 자랑하는 포르투갈인지라 휴양지도 비슷할 거라는 생각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분명 내가 본 사진에서는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 그리고 알록달록한 파라솔 밑에서 햇볕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아니 이게 웬걸. 해수욕은 기대도 안 했건만 이렇게 아름다운 휴양지를 폭풍의 언덕 분위기일 줄이야
비수기에 휴양지를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알다시피 우선 문 연 상점도 별로 없거니와 심지어 문을 연 식당들도 일찍 문을 닫는다. 그래도 내 안의 긍정 요정의 힘을 빌려 굳이 좋은 점을 찾자면... 해변가를 걷기만 해도 마치 실연당한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낄 수 있다거나... 전망 좋은 카페도 마치 빌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는 뭐... 그런....!
그래도 확실히 포르투갈의 겨울은 다른 서유럽이나 동유럽에 비해 확실히 온화하다. 리스본이나 포르투갈 같은 도시는 1월에도 얇은 코트 정도로도 충분했으니! 여러 번의 겨울 유럽여행을 통해 깨달은 바는 겨울 유럽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포르투갈, 스페인, 터키와 같은 유럽의 남쪽이나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휴양지가 아닌 대도시를 갈 것.
아일랜드에서는 무엇을 해야겠다는 욕심이 딱히 없었는데, 그래도 꼭 한 가지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바로 좋아하는 영화 'ps. i love you'의 촬영지인 위클로 국립공원에 가는 것! 아일랜드에 있는 내내 날씨가 좋지 않아서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원데이 투어를 신청했다.
아무리 영국과 아일랜드는 1년 내내 흐린 날이 많다지만... 정말로 이렇게 안개만 보여줄 줄이야! 날씨 덕분에 남녀 주인공이 국립공원을 걸었던 사랑스러운 장소는 금방이라도 해리포터의 디멘터가 등장할 것만 같은 으스스한 촬영지가 되어 버렸다.
그나마 수도 더블린은 언제든 벌컥벌컥 들이켤 수 있는 기네스와 언제나 흥겨운 노래가 흘러나오는 아이리쉬 펍이 있으니 날씨가 흐려도 다른 재미를 찾을 수 있었는데 역시나 이런 자연경관이 다 하나는 여행지에서는 겨울이라는 계절이 아쉬울 수밖에
이곳은 공포의 도시도 뱀파이어의 도시도 아닌!
발트해의 진주라고 불리는 탈린이다.
북유럽이자 동유럽인 탈린의 겨울은 실로 더 대단했다. 우선 어마어마한 추위를 대비하여 준비해 간 두툼한 겨울옷들 덕분에 갖고 다닐 짐이 한가득이었다. 게다가 해가 일찍 지고 우중충한 날씨가 계속해서 이어지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도 어둡고, 조금 구경하다 보면 금방 해가 져서 숙소에 돌아와야만 했다. 하루 종일 야경투어를 하는 기분이랄까.
특히 올해 겨울은 기사에 나올 정도로 유럽에서 한 달 동안 해가 뜬 시간이 10시간 반이라고 하니, 말 다했다..!
http://v.media.daum.net/v/20180120140000353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시청 근처에서 아기자기한 마켓도 열린다고 하던데 1월 초에는 이미 다 철거한 후라 아쉽게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물론 겨울의 탈린도 매력 있었지만 따사로운 햇살, 솔솔 부는 바람 그리고 초록색으로 우거진 나무들이 있는 계절에 방문했다면 탈린에 대한 기억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자꾸 올라와 발걸음을 붙잡았다.
누군가는 겨울에도 좋은 날씨를 만나 이 글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고, 또 나만의 단편적인 경험으로 유럽의 겨울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분명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유럽의 낭만이 있었으며 바글바글한 인파에서 벗어나 오롯이 여행에만 집중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유명 맛집이나 예약하기 어렵다는 숙소도 비교적 쉽게 갈 수 있고 심지어 호스텔 도미토리를 예약하면 큰 방을 혼자 쓰게 되는 행운도 누릴 수 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가격 면에서 성수기에 비해 저렴하게 여행할 수 있다는 큰 장점도 있고.
사실 박물관이 많은 대도시들은 간혹 보수공사를 한다거나 개장시간이 짧아진다는 것 외에는 계절을 크게 타지 않는데, 자연경관을 보러 가는 관광지나 휴양지가 계절과 날씨에 따라 크게 만족도가 좌지우지되는 것 같다.
겨울 유럽 여행을 특별하게 만드는 조그만 팁은 휴양지보다는 볼거리가 즐비한 대도시나 스페인, 이탈리아와 같이 기온이 온화한 유럽의 남쪽 나라를. 아니면 액티비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스위스나 오스트리아 쪽으로 떠나 알프스에서 스키나 보드를 즐기는 방법도 있다.
또한 연말이나 크리스마스 시즌에 볼 수 있는 화려한 길거리 장식과 크리스마스 마켓 또한 유럽의 겨울에만 볼 수 있는 큰 볼거리이다. 프랑스, 독일, 체코 등 유럽 각지에서 성대하게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은 실로 겨울 유럽 여행지로 많이 소개된다.
아니면 추위를 좀 무릅쓰더라도 겨울에 더욱 아름다운 핀란드의 라플란드 주와 같은 눈의 도시나 겨울 시즌에만 볼 수 있는 북유럽의 오로라를 찾으러 떠나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