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지 않겠지만 눈이, 그것도 함박눈이 하루종일 펑펑 내렸다. 더욱 믿지 않겠지만, 이 눈이 첫눈이 아니라는 사실. 대개 10월 말에서 11월 초에 첫눈이 내리는 곳에 살고 있으니 눈이 왔다고 해서 놀랄일은 아니지만, 쉬지 않고 내려 꽤 쌓인 눈을 치울 생각에 문득 심난해졌다. 미처 떨어지지 못한 빨간 단풍잎위로 그리고, 대문 앞 노란 국화화분 위로 가득 내린 눈을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Nice!
한국 나이로 6살인 내 둘째딸이다. 내 허리밖에 안오는 녀석이 발 뒤꿈치를 들어 창문밖을 이리 저리 가늠하더니, 갑자기 서둘러 방으로 뛰어 올라간다. 옷장 깊이 넣어두었던 스키바지, 스키잠바, 스키장갑과 스노우부츠까지 낑낑대며 끌고 내려와 풀세트로 장착하더니, 차고에 있는 썰매좀 내려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한다.
아니, 너 온라인 수업 듣던 중이었잖아. 그건 어떻게 하고.
엄마! 지금 눈오잖아. 빨리 나가야돼 나.
그럼, 언니랑 같이 나가. 너 혼자 어떻게 가려고.
언니는 수업들어야 되서 못간데. 혼자 나갈수 있어 걱정마.
걱정을 하지말라고 안할 상황은 아니지만은, 결심이 굳은것 같아서 남편을 불러 플라스틱 썰매를 내려줬더니 신이나서 뒷마당으로 위풍당당하게 걸어 굴러 갔다. 언니가 못간다고 혹시라도 나나 남편보고 같이 나가자고 할까봐 둘다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그런 얘길 꺼내지도 않으니 다행이다 싶으면서 섭섭한 마음은 뭘까.
혼자서 썰매를 끌고 올라왔다 신나게 타고 내려가길 한 두시간정도 놀더니, 볼은 빨개지고 눈썹에는 눈이 잔뜩 붙어서 들어왔다.
엄마! 핫코코 있으면 좀 갖다줘.
없는데.
겨울이 오면 미리미리 사둬야지. 언제 눈이 올지 모르는데.
… -.- 미 미안해.
담에 시장갈때 꼭 사와. 나 눈에서 놀고나면 꼭 핫초코가 먹고싶으니까.
문앞에서 신속하게 걸리적 거리는 옷들을 싹 다 벗더니 4세용 목욕가운을 입고 욕조로 향한다. 무슨 시간약속이 있는 사람처럼 바쁘다.
뭐하게?
눈에서 놀았으니까 따뜻하게 hot tub해야지 엄마.
무슨 대낮에 핫텁을 해?
(내말에 대답은 안하고) Bath bomb 있어?
없어. 다 썼어.
아 그것도 없어? 담에 시장갈때 꼭 사와. 필요하니까.
끄응 .... -.-
그러더니 그야말로 뜨끈한 물을 잔뜩 받아서, 짧은 다리로 넘어가기도 아슬아슬한 욕조에 들어가더니 여유로운 탕 목욕을 즐기신다.
아, 엄마!
왜 또.
음악좀 틀어주고 나가. 나 목욕할때 음악 들어야되거든.
-.- 내가 졌다. 졌어.
그때까지 온라인 수업 마저 듣느라 방에서 꼼짝도 못하는 큰딸, 나, 그리고 남편까지 우리 가족은 모두 첫째다. 그러니까 우리집에서 이 아이만 유일하게 둘째(이자 막내)인 것이다. 큰 애는 좀 답답하긴 해도 어느정도 행동이 예측되는 아이다. 왜냐면 그 답답하고 유연성 없는 모습이 딱 ~ 어릴때 내 모습이며 남편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책임감이 있고, 규칙을 지키려고 하고, 예측 불가능한 일이나 위험부담이 있는 일을 꺼리는 등 대부분의 첫째들 모습을 가졌다. 그래서일까, 나와 비슷해서 이해가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불만스러운 모습이 함께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 둘째딸은, 늘 예측불가이다. 통통 거리면서 튀어오르는 럭비공 같아서 다음 방향을 예측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통이 크고, 화끈하고, 열정이 넘친다. 내가 머리라도 아프다고 잠시 누우면, 첫째는 종이에 '엄마 아프지마' 라고 카드를 만들어 오는데, 둘째는 세면대에 까치발을 하고 올라서서 수건에 물을 적셔 줄줄 떨어뜨리며 내 머리에 얹어준다. 머리에 물수건 얹다가 머리 감은것 같은 상황이 되버리지만, 이걸 머라고 할수도 없고. 그리고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본인 나름대로는 병간호를 시작하는데 그 작은 입이 1초도 닫히지 않고 종알거리면서 나를 지킨다.
둘째는 또, 언니가 하는 일은 다 하고 싶은데 언니만큼 잘 하지 못하는게 늘 속상한 아이다. 4살때인가 어느날 울면서,
“언니는 나보다 그림도 잘 그리고, 글씨도 잘 쓰고, 피아노도 잘 하잖아 …” 라고 속상해 했다.
나와 남편과 큰아이는 어안이 벙벙해서는,
"당연하지, 너보다 세살이나 많은 언닌데. 당연한거야. 너도 언니처럼 세살 더 먹으면 언니만큼 잘 할수 있어. 걱정하지 마." 위로했더니,
더 큰 소리로 으앙 울면서,
"내가 언니 나이가 되면, 언니는 또 세살 만큼 더 잘할거 아니야. 난 언니보다 잘할수가 없잖아 그럼".
다시 곱씹어 보니 말이 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그 고민의 깊이가 짐작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자꾸 웃기기도 하고 그랬다.
지인중에 둘째 딸이 있었는데 (물론 그 애는 남동생이 밑에 있어 갈등의 도화선을 장착하긴 했었다), 매번 언니와 비교당하거나 언니보다 주목받지 못해서 당하는 "둘째로서의 비애"를 토로하곤 했었다. 그러나 그 얘길 함께 나누던 모든 사람들은 이해가 불가했었다. 왜냐, 다 첫째였거든. 또한, 남편 동료중에 둘째 아들이 있었는데, 어릴때 형 "팬티"까지 물려입은 "둘째로서의 서러움"이 아직까지도 벗어나지 못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이런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나서 마음먹었다.
- 절대 우리 둘째는 첫째랑 비교하지 말자. 그 애 자체로 받아들여야돼.
(쉽지 않다. 이미 나에겐 세살 많은 이그젬플이 있잖아)
- 절대 우리 둘째는 첫째 "팬티"는 물려주지 말자. 나중에 두고두고 원망해.
(한두번도 안입고 못입게 된 새 팬티들 .. 눈 딱 감고 없애자)
우리 둘째는,
눈이 오는 날에는 온라인 수업은 들을수 없는 아이이고,
눈에서 놀고 난 후에는 핫초코를 마시며 몸을 녹여야 되고,
그리고 나면 욕조에 물을 받아 음악소리에 맞춰 발가락을 까딱까딱하며 목욕을 즐겨야 하는,
인생을 즐기는 아이이다.
향년 다섯살에.
엄마가 뭐 사줄까, 뭐 먹을래 물으면 '아무거나', '나 필요없어' 하던 나와 판에 박은듯, 큰 아이도 그런다. 옷을 사러가도 신발을 사러가도 .. 아무거나. 이거 어때 물으면 '좋아'. 저건 어때 물으면 '괜찮아'. 그럴때 바로 옆에서 틈을 비집고 올라와 자기가 미리 찜해놓은 옷과 신발이 있는 곳으로 나를 끌고 가서 어느샌가 지갑을 열어 계산을 하게 만드는 아이가 내 둘째다.
“엄마, 오늘은 계란이랑 후리카케넣고 손으로 꾹꾹 눌러서 만든 주먹밥하고 미소스프를 먹고 싶은데? 근데 깨는 빼고 참기름은 많이 넣어줘”라고 정확히 본인의 의견을 말하는 아이가 내 둘째다.
한번씩 잘못했다고 혼날 일이 생기면, 대답도 안하고 훌쩍거리는 큰애랑 달리, 자기가 이건 잘 못했지만 엄마가 저것까지 혼내는건 너무하다면서 꼬박꼬박 한마디도 안지고 주장을 펼치는 아이가 내 둘째다. 얘랑 말싸움하다가 항상 웃음이 터져서 백기를 드는건 나다.
유치원 선생님이 '하느님은 우리 가슴속에 계세요' .. 하시면 그걸 기억했다가 우유를 마시면서,
"엄마 나 지금 뭐하는줄 알아? 지금 하느님 우유로 샤워시키고 있어. 으흐흐" 이런 엉뚱한 아이가 내 둘째다.
심부름을 하거나 착한일을 할때마다 동전을 받아서 저금을 하는데, 큰애는 당장 쓸데가 없다고 나중에 필요한거 사겠다고 꼬박꼬박 모아서 100불이 다 되어가지만, 우리 둘째는 저금 따위는 없다. 단돈 5불이 모여도, 무조건 쓰고 본다. 4.99 짜리 장난감을 귀신같이 찾아온다 (텍스는 안내니?). 그러니 돈이 모일 틈이 없다. 10불 들고가서 20불짜리 장난감을 골라오면서,
"엄마! 내가 나머지는 나중에 돈 받으면 줄께. 앞으로 나한테 10불치는 안줘도 돼." 내가 완전 졌다.
현재의 즐거움에 오롯이 집중하는 아이가 배로 내 둘째다.
큰애가 이리봐도 저리봐도 딱 ‘나’라서 나도 모르게 감정 이입도 잘 되고 끌리는 점이 있다면, 둘째는 어딜봐도 ‘나’랑 닮은 구석이 없어서 신비로운 매력이 있다. 같은 유전자를 이리저리 조합해서 나온 두 녀석인데, 키우면 키울수록 자매가 이렇게 다를수 있나 싶어 놀랍다. 호불호가 확실하고, 취향이 확고하고, 언니가 하는거라면 달나라에라도 가야한다는 의지가 있고, 틈새공략에 능한 둘째는 나에겐 아주 신기방기한 녀석이다. 나랑은 정말 달라서, 점점 더 알고 싶어지고 사귀고 싶어지는 매력적인 이성친구 같은 느낌이랄까.
이쯤되면 우리 둘째는 "둘째로서의 서러움" 이나 "둘째로서의 비애"와는 조금 거리가 멀어보인다. 둘째로서의 지위를 마음껏 향유하고 막내로서의 특권을 고스란히 제 것으로 만드는, 스스로도 우리 집에서 자기 혼자 "second born" 인것을 특별하다고 자랑스러워 한다.
아이구 내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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