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살며 쓰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이제이 Sep 10. 2020

9월, 다시 시작

가을을 시작하는 나만의 소소한 의식

내 생일은 3월 5일이다.  

부모님의 역량에 따라서 학교를 한해 빨리 들어가 빠른 몇년생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제 해에 학교에 들어가서 반에서 제일 개월수가 많은 학생이 되기도 한다.

나는 제 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반 여자아이들 중에서 키가 제일 컸었다.


실은 봄을 좋아했지만, 학생 입장에선 3월생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했다.

새학년이 시작되면서 바로 생일을 맞이하기 때문에,

새로운 반의 서먹한 친구들 사이에서 제대로 생일 축하도 못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생일파티도 대개는 전 학년 친구들을 초대했던것 같다.

손에 꼽아도 몇번은 입학식과 내 생일이 겹치기도 했는데,

그럴땐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생일을 보내야만 했다.


새 학교, 새 학년, 새 반, 새 선생님과 친구들, 그리고 새 짝.

어디 그 뿐인가 엄마가 장만해준 새 가방과 새 신발, 새 옷을 입고 시작하는 새학년은,

꽃도 피고 새싹도 올라오고 날씨가 좋아지기 시작하는 봄, 3월에 제법 어울렸다.

그 정신없는 3월 초에 생일이 있는건 좀 아쉬웠지만,

모든 시작이 봄, 3월과 함께 시작하는건 지구가 태양주변을 도는것 처럼 당연한 일로 느껴졌다.


그러다가,

나이가 서른에 가까워질 무렵부터 꽤 오랫동안,

가을에 새 학년이 시작하는 나라에서 공부를 했고 아직도 살고 있다.


공부를 하러 간 첫 해에는, 여름을 지나고 다음 학년으로 올라간다는 것이 영 어색했다.

내 학창시절 순서도에 따르면, 여름방학은 학년의 한 중간에 있었고,

2학기가 시작하면 늘 여름방학 숙제를 내야 했기 때문이다.

여름은 봄학기와 가을학기를 연결해주는 다리같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여름이 한 학년의 마무리와 새로운 학년의 시작이라고 하니

뭔가 신체적, 정신적 리듬이 약간 엇박자를 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사람은 금방 적응을 한다고,

어느덧 날씨가 따스해지는 봄을 지나 초 여름쯤에 학년을 마무리하고,

길어도 너무 긴 여름방학을 보내고,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다가도 어느날 갑자기 아침 저녁으로 쌀쌀해져서 가디건 하나를 챙길 즈음이 되면 시작하는 새 학년이 익숙해져갔다.


여름 방학 막바지에 들어서면,

학교 서점을 찾아서 교과서도 사고 노트도 사고 작은 메모장에 새학년 계획같은것도 적으며

새 학년 준비를 했다.

1월부터 시작해서 12월에 끝나는 다이어리가 아니라,

학사일정에 맞춘 8월부터 시작해서 다음해 여름까지 이어지는 Half-year Diary를 사용하게 되었고,

새 다이어리에 강의 스케줄과 숙제들을 빼곡히 적어나갔다.

12월 마지막날과 1월 첫째날이라는 날짜로 변하는 한 해보다,

오히려 새학년과 함께 많은 것이 새로 시작된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신입생들이 들어오고, 졸업생들이 떠난 자리.

새학년이 들어 바뀐 강의실과 연구실.

대체로 여름방학동안 계약이 만료되어 이사를 오고가는 경우가 많으니 새 집까지,

 그렇게 다시 한해가 시작이었다.


한국에서 학교에 다닐땐,

꽃샘추위에 옷깃을 여미다가도 훈훈해지는 봄바람을 맞으며,

이제 또 새학년이 시작이구나 했었는데,

이젠 길고 더운 여름을 지나서 차가워지는 바람결에 상쾌한 기분을 느끼며,

이제 또 새학년이 시작이구나 생각하게 된것이다.


가을에 시작해서 여름에 끝나는 학교 생활을 졸업한지는 벌써 꽤 되었다.

내가 학생일때부터 학교가 직장이었던 남편과,

졸업 후 한두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나에게,

새학년이 시작되는 9월은 여전히 특별한 시작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갈 나이가 되니 더더욱 그렇다.

스토어마다 Back-to-school 매대를 만들어 학교에 가지고 가야할 학용품 준비를 재촉한다.

학교에서 아이들 스쿨버스 스케줄과 일과표가 도착하고,

아이들은 새 학년 새 선생님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되니 다들 긴장반 기대반이다.

새학년을 시작하는 가족들을 챙기는 것만으로 내 몸과 마음은 바빠진다.


처음에는 영 어색했던 9월과 새학년의 시작이라는 조합이,

적지 않은 시간을 지나오면서 어느새 나를 또 길들였나보다.

나도 뭔가 이 9월과 함께 무엇을 시작하고, 각오를 다지고, 기대반 설렘반으로 첫주를 보내고,

그렇게 시작해야만 할것 같았다.

다들 학교에 보내고 별안간 내 자리에 돌아와보니,

9월은 이제 내 개인적인 삶과는 별 인연이 없다는걸 알게 되었다.

나의 하루는 8월이나 9월이나 변하지 않았음을 깨달은 것이다.


물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가족들을 응원하고 지원하는 것만으로 바쁘고 덩달아 설레긴 하지만,

아무래도 뭔가 빠진것 같이 섭섭한 기분이다.

새 책가방이나 새 노트를 사는건 아니더라도,

9월 모두가 새학년을 시작할때 나도 나만의 소소한 의식을 치뤄야겠다고 생각했다.

매일 비슷한 하루하루가 반복된다 하더라도,

9월만큼은 아침저녁으로 코끝이 찡한 시원한 공기를 느끼며,

인생의 다음 라운드를 뛴다는 기분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들 새학년 준비를 시키며 새 신발을 주문할때,

나는 내 새 운동화도 하나 끼워넣었다 - 9월 새 학년 맞이 새 운동화.

이 운동화 신고 갈 학교는 없지만, 뭔가 나도 새로 시작하는 기분을 내고 싶었다.


새 운동화를 신고 동네를 한바퀴 돌면서, 지나온 많은 9월을 떠올렸다.

또, 그 9월에 했던 많았던 계획과 각오들도 떠올렸다.

나는 그 여러해의 9월을 지나오면서,

마음먹은 것들을 해내기도 하고 또 해내지 못하기도 하며,  

지금 아마도 이 자리에 있는거겠지.


내년 9월, 새 운동화를 기약하며.


매거진의 이전글 가을이 시작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