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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제이 Sep 22. 2020

하마터면 우울할뻔 했다, 노안   

노화를 받아들이는 자세


장보러 마트에 가서 물건이 가득 들어찬 선반을 둘러보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자기가 돋보기를 안가져와서 안보여서 그런데,

이 과자박스에 써 있는 유통기한 좀 읽어달라는 부탁이었다. 


무슨일인가 싶어서 긴장했다가,

'아 .. 난 또. 네 그 연세 되시면 다 그러시죠 뭐.'

라고 '속'으로만 생각하고, 

별일 아니라는 듯이 눈을 찡긋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건을 건네받아 유통기한이 써있다는 쪽을 들여다 보는데,


이런.

나도 안보이는 것이라! 

(대략 난감) 


과자하나 들고 눈에서 멀찍이 떨어뜨려도 보고

천장 불빛에 비춰도 보고

한쪽 눈을 감고도 보고

미세하게 눈꺼풀을 조절해서 실눈을 뜨고 보기도 했는데

(물론, 실눈 + 한쪽눈 감기도 시도했음) 


어머 웬일. 여전히 안보인다.

이럴리가 없는데. 


글씨가 너무 작고 - 글자 하나가 통깨 반만한 사이즈

잉크도 군데군데 벗겨진데다가 

과자 봉지 색이 너무 어둡기도 하고 

이런 저런 구질구질한 변명을 가져다 붙인데도


안보일게 보일리 없었다. 


그때부터는 당황스러워서 

과자봉지 한번 봤다가 아주머니 한번 봤다가 

한국말로 조용히 "왜 안보이지" 했다가

오만가지 이상한 포즈로 

이 글자를 내가 오늘 보고 말겠다는 집념을 보였다.


그 집념이 부담스러우셨는지 

같은 처지의 나에게 큰 짐을 주신것 같아 머쓱하셨는지 

전화기로 후레시까지 비춰가며 눈을 들이미는 내가 안타까웠는지

아주머니가 괜찮다고 미안하다며 물건을 돌려받으시려고 했다. 


근데, 

그냥 줄수가 없었다. 


내가 계속 물건을 건네드리지 않고,

조금만 기다려보시라고 내가 읽어드리겠다고 어린애처럼 떼를 쓰다가,

간신히 어느순간 매직아이처럼 붕~ 하고 떠오른 


21Aug22


아, 이거다. 올 것이 왔구나. 

다른 코너에서 물건을 고르던 사람도 들리게 

쩌렁 쩌렁 두번이나 읊어드렸다. 

조금 더 오버했으면 감격해서 아주머니와 허그할뻔 했다. 


이거, 노안 맞지?





장보러 가서 있었던 일화를 남편에게 얘기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내가 그간 한 짓이 있으니 남편이 또 좋은 말 할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쯧쯧 ... 2년전에 나 놀리더니, 기분이 어떠셔?"


남편과 나는 딱 두살차이인데

모든 노화증상이 딱 2년차이로 정확히 차례대로 온다.

보통 노화증상은 남녀가 다르게 나타난다고 하는데 희안한 일이다. 

처음엔 당신 흰머리 생기네, 피부도 처지고, 눈은 안보여 어쩌냐며 남편을 놀리다가,

2년 딱 지나서 흰머리 생기고, 피부 처지고, 눈이 안보이게 되어 

'놀린만큼 + 이자'까지 되받고 있는 중이다. 


당시 남편은 매주 나가던 동네 조기축구, 아니 조기야구팀에서 뛰었는데,

시력에 문제가 생기면서 크게 좌절했었다. 

인생살면서 크게 희노애락에 감정표현을 적절히 하는 사람이 아닌데,

시력문제에는 꽤 예민하게 반응했다.

온종일 화면을 보며 일하는 사람인데다가

유일한 취미생활이었던 야구에까지 영향을 미치니

한번도 보지 못한 기운빠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흰머리가 갑자기 많이 생겼을때도 그랬다.

안방 욕실에서 둘이 가르마를 이쪽 저쪽으로 바꿔가며

아니 이 흰머리가 언제 이렇게 생긴건지 놀라워햇다. 


수영장에 가서 예전처럼 몇바퀴씩 쉬지않고 못하겠다고 할때나 

미간에 어느새 자리잡은 주름자국을 볼때도 

"아 우리 이렇게 늙는구나"란 탄식이었다. 



아! 그만해 !!



몇번 그런 얘길 같이 하다보니, 이게 이래서 될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 남은 인생 살면서 다시 젊어진다거나 몸상태가 20대로 좋아질 가능성이 없다. 

이 논리대로라면, 우린 지금쯤부터 세상떠날때까지 줄창 

'여기도 늙고 저기도 늙네' 라며 

매번 속상해하고 슬퍼해야한단 말인가. 

흰머리가 더 많이 생길때마다 

고관절이 요란한 소리를 낼때마다

'내가 이만큼 더 늙었구나' 말하며

탄식해야 한단 말인가.


남편에게 제안했다. 

우리 앞으로 닥칠 "모든종류의 노화" 를 

기꺼이 '즐겁게' 받아들이자고. 


즐거울것까지 있느냐고 남편이 반문했지만, 

그렇지 않을것도 없다. 

내 몸이 점점 자라나는 걸을 보고 신기해했던 어린시절처럼

내 몸이 점점 늙어가는 것도 신기해할일이 아닌가.

어디가 언제부터 안좋아지기 시작했는지,

내 머리카락의 몇%가 흰머리인지 

세상에 책을 눈 앞 몇 센티미터에 둬야 잘 보이는지

몇 종류의 영양제를 먹는지 

그런 변화들 말이다.  


어릴때 한해가 지날때마다 키가 얼만큼 크고 몸무게가 얼만큼 느는걸 당연하게 생각했듯이

우리가 늙어가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하면 덜 갑작스럽고 덜 우울하지 않을까. 

기운없어 하는 남편을 보고 우울해하지 말라고 했지만,

늘 규칙적이던 생리가 불규칙해지고 달을 거르는 일이 잦아지면서

나도 꽤 기분이 별로였다. 

그건 남편이 2년전에 경험하지 않은 종류의 변화(?)라 더욱 외로웠다.

그리고 아직 주변사람들과 비교해봤을때 너무 빠른것 같아

이게 다른 병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고민끝에 산부인과 의사에게 의논을 했더니, 

젊은 산부인사 여의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폐경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로 접어들었어요" 라고 해서,

하마터면 우울해질뻔 했다. 


그러나 우울해하는 대신,

나의 '노화일지'에 기록해나가기로 했다. 

내 나이가 중년이니 중년일지 갱년기일지가 되었다가 

나중엔 노년일지 그 다음에는 치매일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변화하고 있는 나를 기록해나가는 건 꽤 의미있는 일이 될거라고 믿는다. 

젊었던 나도 '나'이고, 지금의 '나'도 나이고, 그리고 앞으로 호호할머니가 될 '나'도 나니까.

인생의 항해를 하면서 어디가 얼만큼 고장나고 있는지 기록하고 살펴보는건

나를 염려하고 걱정하고 그리고 잘 살아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자식들이 뱃속에서 나오기도 전에 '태교일기'를 쓴다고 

매달 초음파 사진을 붙여가며 자라는 모습에 흐뭇해했고,

애들이 태어난 후에는 백일이 되었네 돌이 되었네라며 

자식들 성장일지를 그렇게 꼬박꼬박 열심히 썼으니,

이젠 우리의 몸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정기검진 열심히 받으며 

우리의 노화일지를 꼬박꼬박 쓸때가 오고 있는 것이다. 


어디 신체적 노화뿐일까. 

아마 우리의 정신적 노화도 함께 따라올것이다.

자주 우울해질수도, 인생의 중요한 사람을 상실할수도, 작은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할수도 있을것이다.

어릴때 나의 할아버지가 유난히 까탈스럽고 맘에 안들어하시는게 많은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그 나이 가까이 가려면 20-30년이나 남은 나도 20대와는 조금 달라져간다.

보고싶지 않은 사람 굳이 보면서 스트레스 안받고 싶고

그래서인지 인간관계는 점점 단순해진다.

가끔은, 그때 어렸을때 나는 왜 그렇게 나이스했을까 

왜 그렇게 미안하다는 소릴 쉽게 했을까

그런 생각이 갑작스레 들어 신경질 날때도 있었다. 


우울해지는걸 무조건 금기할필요도 없다.

우울한것도 당연하지, 그것도 괜찮다.

우리의 정신도, 신체와 함께 변화하고 있을 뿐인거니까.

그래도 그 우울의 늪에 깊게 빠져서, 

나의 다른 부분의 삶까지 무기력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계속될 

내 빛나는 노화과정을 위해서 말이다. 




마트에 다녀오고 며칠 후에 

남편이 정확히 2년전에 다녀왔던 안과에 예약을 하고 의사를 만났다.


아쉽게도, 

아직은 돋보기가 필요없다고 해서 

약간 실망했다.


돋보기용으로 동그란 뿔테의 밤색 안경테를 찜해두고 왔는데,

조금 더 기다리는 동안 예쁜 돋보기를 몇개 더 골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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