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힘으로도 넘을 수 없는 일기 쓰기
오늘도 텅 빈 교실에 지태와 내가 있습니다. 지태는 어제처럼 교실에서 혼자 남아 일기를 쓰고, 나는 교사용 책상에서 밀린 업무를 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지태가 일기장을 들고 검사 맡으러 옵니다. 그 참에 나는 입이 간질간질하던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태야, 너 정말 다현이 좋아하나?”
“예.”
역시 소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적이 걱정입니다. 마음씨 곱고 공부 잘하는 다현이가, 키도 작고 일기도 매일 안 써오는 개구쟁이 지태를 받아줄까? 글쎄올시다. 하지만 그즈음 이미 지태는 공개 이벤트를 작심하고 있었습니다.
“저 오늘 바빠요. 문방구에 커플링 사러 가야 해요. 5천 원짜리 반지 살 거예요.”
거금 5천 원씩이나 하는 반지를!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다현이가 지태의 커플 제안을 뿌리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다음 날, 공부 시간에 보니 지태가 한 손으로 자꾸 제 이마를 만졌습니다. 고사리 같은 손에 은빛 실반지가 반짝거렸습니다. 그 뒷줄에 앉아 있는 다현이 손가락에도 똑같은 모양의 반지가 있었습니다.
놀랍다. 이지태! 대단하다. 이지태! 하지만 그 역사적인 날 오후에도 지태는 남아서 일기를 써야 했습니다. 지태가 일기장을 펼쳐 들고 검사 맡으러 왔습니다. 일기 제목이 ‘소스 치킨’이었다. 닭다리를 사다가 구워서 소스를 발라 먹으면 엄청 맛있다. 언젠가는 내 여친한테도 만들어서 맛을 보여주어야 하겠지만, 선생님도 꼭 한번 드셔 보시라는 내용이 구구절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일기장에 사인을 하고 돌려주면서 나는 의미 있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지태야, 니 옆자리에 다현이가 앉았으면 좋겠지?”
지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같이 앉게 해 주까?”
“진짜요?”
“딱 사흘만 일기 써와라. 그러면 다현이와 짝꿍 시켜주게!”
“진짜요?”
“당근, 진짜지!”
“올레!!!!!”
사랑의 힘은 역시 위대합니다. 다음 날 아침 지태는 거짓말처럼 일기를 써왔습니다. 제발 일기 좀 써 달라고 그렇게 간청하고 윽박질러도 안 통하더니 아! 이게 대체 몇 달 만인가. 놀랍게도 지태는 그 다음날 아침에도 이틀 연속 일기장을 냈습니다. 당당하고 의젓하게! 그런데 하필 마지막 날, 즉 세 번째 일기장을 제출해야 하는 날이 월요일이었습니다. 지태는 토요일 일요일 너무 신나게 노는 바람에 일기 쓰는 것을 깜빡 잊고 말았습니다. 딱 한 번만 더 일기를 써왔다면 여자 친구 하고 앉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아깝습니다. 그렇지만 약속은 약속. 어쩔 수 없습니다.
월요일 오후 텅 빈 교실, 지태 곁에는 다현이가 아니라 내가 있었습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또 지태는 덜렁덜렁 일기장을 들고 내 앞에 나타났습니다. 나는 사랑의 불씨로 어린 학생의 향학열에 한번 더 불을 붙이고 싶었습니다.
“지태야, 그런데 너 자꾸 이러다가 나중에 커서 네 여친이 이렇게 말하면 어쩔래. 지태씨, 날마다 일기도 안 써오는 무책임한 행동을 하시면서 어떻게 제 인생을 책임지시겠어요? 하고 물어보면 어쩔래? 그러다가 깨지기라도 하면 어쩔래?”
그랬더니 외로운 열한 살은 한순간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그러면 그냥 쿨 하게 헤어질래요. 엄마처럼 뭐라 뭐라 자꾸 하면 귀찮단 말이에요.”
나는 그 단호한 마음을 돌리지 못했고, 지태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느긋하게 교실에 남아 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오늘 점심시간, 지태가 식사가 끝난 빈 식판을 검사 맡고 가다가, 다시 돌아서더니 내 귀에 제 입을 바짝 대고 소곤거렸습니다.
“선생님, 저 다현이하고 깨졌어요.”
“으잉? 왜? 왜?”
“아직 초등학생인데 그러면 안 되잖아요. 대학생쯤 되면 몰라도 지금은 좀 빠르잖아요.”
누가 뭐라고 그랬나. 녀석은 나에게 한 수 가르쳐주는 듯 그렇게 말하고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교실에 와서 보니 우리가 언제 커플이었냐는 듯, 지태는 지태대로 남자애들과 신나게 골마루를 달리며 장난을 치고, 다현이 또한 다현이대로 여학생들과 깔깔 대며 끼리끼리 아주 잘 놀고 있었습니다. 오로지 나만 ‘도대체 이 아이를 어떻게 꼬드겨 일기를 써 오게 할 것인가’ 하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