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웃음 이한나

언덕 위 외딴집에서 찾은 화목

by 최형식

소풍을 다녀왔다. 아이들은 썰물처럼 학교를 빠져나가고, 나는 교무실 의자에 노곤한 다리를 걸친 채 자울자울 졸고 있었다. 그런데 교무실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아이 얼굴 하나가 쏙 들어왔다. 아이는 대뜸 나를 보고 “선생님, 운동장에 어떤 할머니가 울고 있어요!”라고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아이를 따라나섰다. 정말 할머니 한 분이 어린아이처럼 화단가에 앉아 계셨다.


“무슨 일로 그러시냐?”라고 여쭈니, 소풍 갔다 온다던 손녀가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아 걱정이 돼 학교까지 오셨단다. 그런데 손녀가 보이지 않아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단다. 할머니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내가 걱정되는 사람은 손녀가 아니라 오이려 할머니였다. 손녀 이름을 물었더니 ‘이한나’라고 했다. 한나! 우리 반 못난이 한나! 나는 웃으며 내가 담임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아마 아이들이 소풍 여흥이 남아 어디선가 놀고 있을 것이니 걱정 마시라 하였다.


할머니를 교무실로 모시고 왔다. 그리고 우리 반 여자 아이들이 모여 있을 만한 집 몇 군데에 전화를 돌렸다. 잠시 후, 한나가 짧은 단발을 나풀거리며 교문을 들어오고 있었다. 열한 살 수다쟁이 여자아이. 작은 눈과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말괄량이. 공부는 못하지만 날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늘 웃고 다니는 아이.


그 아이가 활짝 웃으며 교무실에 들어와 할머니 품에 안겼다. 할머니는 “아이고, 내 새끼야!” 하며 울먹였다. 한나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할머니 눈가를 닦아주었다. 열 한살 꼬마가 어른 처럼 할머니를 부축하고, 허리 굽은 할머니가 아이처럼 손녀 손을 잡고 교무실을 나섰다. 창문 너머 멀리 할머니와 손녀가 다정하게 손 잡고 운동장을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는 가끔 걸음을 멈추고 할머니 눈물을 닦아 드렸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안 있어 가정방문을 가게 되었다. 나는 우리 반 아이들을 길잡이 삼아 동네를 돌았다. 한나네 집은 마을과 떨어진 곳이라 제일 마지막에 방문했다. 언덕을 올라 외딴집 낡은 대문을 들어서자, 마루 한쪽에 개다리소반을 펴놓고 숙제를 하던 한나가 깍듯이 인사를 하였다.

“에이, 선생님 오신다고 공부하는 척하시네”


아이들이 놀리자 한나가 헤헤 웃었다. 한나는 고구마와 시원한 물을 쟁반에 담아 내놓았다. 제법 손님맞이를 하였다. 곳곳에 선생님을 기다리던 아이 마음이 묻어났다. 좁은 마루는 반질반질 빛이 나고 마당에는 빗자루로 쓸고 난 가지런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할머니는 밭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고 중학생 오빠도 해 저물녘이 되어야 온다고 했다.


나는 마루에 걸터 앉아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처마 밑 벽에 사진 액자 두 개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하나는 갓을 쓴 노인 사진이었고, 다른 하나는 결혼식 사진이었다. 사진 속 신랑과 신부가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웃음이 한나를 닮아 밝고 고왔지만 왠지 내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사진 아래 벽에는 흰 종이에 써 붙여놓은 글귀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화목'이라고 써 있었다. 정성 들여 써서 붙였지만 가로선이 맞지 않아 조금 삐뚜름하게 보였다. 딱 보니 한나 글씨였다. 한나한테 물었다.

“네가 쓴 거냐?”

“예.”


이번에는 열심히 고구마를 먹고 있는 길잡이 아이들한테 물었다.

“애들아, 화목이 무슨 뜻인 줄 아나?”

“.....”

모두 당나귀 남대문 보듯 멀뚱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나한테 다시 ‘화목’이 무슨 뜻인지 물었다. 한나가 대답했다.

“우리 할머니하고 오빠하고 오래오래 사는 거요.”


그래 그래 맞다. ‘화목’이란 지금 내 곁에 있는 내 가족이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함께 사는 일이다. 나는 사진 속 신랑과 신부를 대신해서 한나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한나네 집을 나섰다. 가파른 내리막을 걷다 보니 해가 벌써 서산마루에 걸려 있었다.


밭에 가신 할머니도 읍내 중학교 간 오빠도 아직 오지 않았으니, 열한 살 한나가 저녁을 준비하겠다. 아마 오늘도 한나네 저녁밥은 한참 늦어 질 터이다. 그렇지만 새벽은 이 작은 외딴집에 제일 먼저 찾아와 밝고 담담한 여명을 비춰 줄 것 같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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