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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식 Nov 07. 2021

북덕 바람

못난 아들의 어리석음을 검불처럼 날려 보내고

동생이 떠나가고 외딴집에 엄마 혼자 살게 되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엄마 집에서 통근할 수 있는 곳으로 전근을 갔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 이상했다. 떨어져 있을 때는 늘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뿐인데, 막상 매일 함께 지내니 그렇지만 않았다. 엄마와 나는 가끔 티걱태걱하였다. 나는 마치 버릇없는 아이처럼 툴툴거리고 삐지고 토라졌다. 


겨울이 가까운 어느 날, 퇴근을 하고 대문을 들어서니 마당 여기저기 배추 이파리와 김장용 비닐 같은 것들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엄마는 낮부터 혼자 텃밭에 배추를 뽑아 밑동 잘라 가르고 소금 간을 친 것이다. 수돗가 커다란 물통에 소금 간을 절인 배추가 가득 차 있는 걸 보니 왈칵 화가 났다.  엄마는 작년에도 혼자 김장해서 우리들 애간장을 태웠다. 올해는 제발 그러지 말라고, 주말에 가족들 모두 불러서 함께 하자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까지 끼워 넣어 일을 벌인 것이다. 그것을 보니 퇴근 후 피로감이 극도로 밀려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니 엄마가 모기 소리 만하게 말했다. 

“한 시간쯤 있다가 배추 간물 씻어낼 때 좀 도와주게.”     


엄마는 처음에는 두 시간 정도 있다가 시작하자고 했지만, 내가 불만 어린 표정을 짓자 이내 한 시간 후라고 고쳐 말했다. 나는 들은 척 만 척 방으로 들어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슬그머니 거실로 나가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방문 앞에 빨간 고무장갑과 털모자와 마스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앞에 털모자와 마스크를 쓴 엄마가 망연히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입이 한 발이 튀어나온 채 배추를 씻었다. 어두운 마당에서 찬물에 풀 죽은 배추 포기를 마구 흔들고 건져 내면서 엄마를 원망했다. 이 밤중에 팔순 노인과 중늙은이 아들이 대체 뭘 하는 짓인가! 나는 전쟁을 치르듯 작업을 하였다. 아무리 배추 포기를 씻어도 내 안에 화는 풀리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할 때도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 대신  “나, 갑니다. “ 하고 대문을 나섰다. 정말 어디라도 떠나고 싶었다.      


다음 날 퇴근하고 왔더니, 저녁 밥상에 몽어회 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엄마는 삐뚤어진 아들이 당신을 힘들게  한 날이면 그렇게 새벽장을 봐 다녀오셨다. 이번에는 몽어 새끼를 사다가 단정하게 손질을 해서 냉장실에 넣어 두셨다. 그리고 내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추어 나비처럼 회를 떠서 내놓은 것이다. 저녁 반주로 꼬들꼬들한 몽어회를 곁들여 소주 한잔을 털어 넣었다. 내 속에 뭉쳤던 화가 거짓말처럼 풀려 내려갔다.      


알딸딸하게 취해서 초저녁에 잠든 밤, 창밖에 초겨울 바람 소리가 유난스러웠다. 밤바람은 유리창을 흔들고, 낡은 창고 문을 삐걱거리게 하고, 마당에 있는 고양이 밥그릇을 이리저리 굴리고 다녔다. 심심한 바람이 이 밤중에 누군가를 불러내서 같이 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선잠을 깨어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마당으로 나갔다.   

   

창고 문을 잠그고 감나무 밑까지 굴러간 고양이 밥그릇을 제 자리에 가져다 두었다. 그러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밤하늘이 쩍 갈라지고 그 사이로 별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은빛 금강석이 총총 박혀있는 놀라운 하늘이었다. 바람이 또 장난스럽게 내등을 밀었다. 나는 얼른 방으로 들어왔다.     

  

엄마도 인기척에 잠을 깨어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얼른 들어오지 않고 뭐했냐?”

나는 마당에 바람 설거지하고 왔다고 대답했다.  

“바람이 왜 저렇게 유별하게 분답니까?”

"옛날 사람은 저런 바람을 북덕바람이라 그랬지."


엄마가 내 쪽으로 돌아 누우며 말씀하셨다. 북덕바람? 생전 처음 듣는 바람이었다. 엄마는 북덕바람을 말해 주었다. 늦가을 추수를 손으로 하던 시절에  불던 바람이라고 했다. 검불과 지푸라기가 섞인 나락을 바가지로 퍼서 높이 들어 아래로 부으면서 알곡을 고를 때, 때 맞추어 불어주는 바람. 소리만 컸지 하나도 맵지 않는 그 바람은 지푸라기와 검불과 먼지를 날려 보내고 알곡만 남겨 주는 고마운 바람이라고 하셨다.  


소리만 컸지 하나도 맵지 않는 북덕바람..... 내가 잘못한 날이면, 엄마한테서 언제나 그 바람이 불어 왔다. 당신 가슴에서 불어 온 북덕바람은 못난 아들의 어리석음을 먼지처럼 검불처럼 지푸라기처럼 날려 보내고, 알곡 같은 모정(母情)만 고스란히 남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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