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형식 Dec 02. 2021

지우개 자매

야무진 동생과 순한 언니 이야기

아침에 교실 창문을 열었다. 밤새 눅눅해진 공기 빠져나가고 신선한 공기가 들어왔다. 내친김에 골마루 창문까지 모두 열고 교실로 들어오려는데, 옆 반 교실 문 앞에 꼬마 한 명이 서 있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고학년 교실 앞에 서 있는 걸 보니 1학년 하룻강아지가 분명했다. 그냥 그래서 지나가려다 말을 건네 보았다. 

“몇 학년이야?”

“1학년인데요.”

“왜, 4학년 교실문 앞에 서 있는데?”

“우리 언니한테 왔는데요.”

“왜?”

“언니가 내 지우개를 가져갔는데 안 돌려줬어요”     


열어놓은 교실 문 안에 언니가 보였다. 열한 살짜리 언니는 교실 뒤쪽에 있는 사물함을 열어젖혀 놓고 열심히 지우개를 찾고 있었다. 그 언니가 아주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동생은 빚 받으러 온 사람처럼 교실까지 따라와서 지우개 달라고 재촉하는데, 지우개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고, 옆 반 선생님은 뭔 일인가 싶어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고....  난감한 아이 마음이 바쁜 손끝에 묻어났다. 그래도 착한 언니는 짜증 내지 않고 열심히 지우개를 찾고 있었다. 마치 어릴 때 누나와 나처럼.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 저녁 밥상을 물리고 밤이 이슥해지면 아버지는 누나와 나를 앉혀 놓고 천자문을 가르쳤다. 당신이 먼저 송독음으로 그날 밤에 배울 부분을 읽어주시면, 누나와 내가 외워서 검사를 받은 서당식 공부였다. 우리는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곳까지 정확히 외워야만, 따뜻한 이불속으로 들어가 잘 수 있었다.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     

딱 그까지만 제대로 외워졌다. 그다음부터 나는 헷갈리고 더듬거리고 계속 틀렸다. 똑똑한 누나는 입에서는 그 어려운 한자가 또록또록하게 흘러나왔다.  

"집 우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 


항상 누나가 먼저 포근한 이불 속에 들어갔다. 나는 외우기는커녕, 꼬박꼬박 졸기 일쑤였다. 참다못한 아버지가 졸음을 깨고 오라며 방에서 추방했다. 나는 내복 바람으로, 희미한 불빛이 창호지에 어른거리는 방문만 바라보았다. 

      

지우개를 찾고 있는 순한 언니한테 어렴풋이 동병상련 같은 것을 느꼈다. 보이지 않는 지우개를 찾자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아무래도 언니는 지우개를 못 찾을 것 같았다. 나는 우리 교실에 가서, 모아 둔 지우개 중 쓸만한 것을 두 개 들고 야무지게 생긴 꼬마 채권자 앞에 섰다. 그리고 양손에 지우개를 하나씩 들고 아이 앞에 내밀어 보였다.

“어떤 거 할래?”

아이가 묵묵부답이었다. 지우개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공짜가 싫다는 것인지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나 골라봐? 왜?”

그랬더니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우리 집에 지우개 많아요.”     

오, 진짜 만만치 않는 꼬마였다. 낯선 사람의 선심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말하는 아이가 의외로 기특하게 보였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없잖아. 오늘 공부할 때 필요할 건데.”


그랬더니 양손에 든 지우개를 번갈아 보다가, 그중 하나를 골라서 쪼르르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나는 남은 지우개 하나를 아침부터 진땀을 뺀 어린 언니한테 주었다. 아이가 부끄러운 듯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았다. 다행히 어린 구경꾼들이 몰려오기 전에 상황이 끝났다. 나도 후련한 마음으로 우리 교실로 돌아왔다.

  

둘이 다 똑같이 순하지 않아서, 둘이 다 똑같이 야물지 않아서 다행이다. 언니 동생은 날마다 그렇게 아옹다옹하며 자라겠지만, 매서운 바람 부는 어떤 날이면, 야무진 동생이 흔들리는 언니를 아버지처럼 바람막이가 되어 주겠지. 눈보라 치는 어떤 날이면, 순한 언니가 지친 동생을 엄마처럼 안아 주겠지. 그 시절 좁은 방 백열등 아래에서 울고 웃던 가족처럼.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로 보이지 않던 야속한 날들처럼.

이전 05화 짱입니다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