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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Dec 27. 2019

잠깐 만나 실컷 놀았던 나의 친구, 정분이 씨

정분이 씨를 처음 만난 건 아마도 4년쯤 전의 일이다. 아직 남편이 아닌 사람과 결혼인지 아닌지 모를 이야기를 진행시키며 그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가족의 한 명으로 나와 정분이 씨는 만났다.


주민등록번호가 32로 시작하는 정분이 씨는 '노인'에 대한 나의 편견을 살뜰히도 조각내 주었다. 손자의 말이라면 뭐든 좋다고 하는 우리 외할머니랑은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손자가 하는 사투리를 어색하다고 지적하고, 손자가 가져온 선물을 맘에 안 든다고 돌려보내고, 손자가 맡긴 화분은 꽃이 안 펴서 재미없다며 툴툴대는 할머니.


정분이 씨를 만나기 전, 나는 노인들의 취향을 딱히 궁금해한 적이 없다. 으레 한식을 좋아하겠거니, 손주 하는 말들은 다 예뻐 보이겠거니, 80 먹은 인생에 이제와 딱히 궁금한 일들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분이 씨는 자꾸 저게 뭐냐고 묻는다. 내 의견을 말하면 "그건 니 생각이고" 라며 받아친다. 티비에서 본 생활지식들을 메모장에 빼곡히 적어놓는다. 젊었을 때 간 유럽 여행지의 풍경을 샅샅이 기억한다. 그리고 묻는다. "니도 가봤나?" 그곳의 요즘 상황을 궁금해한다. 할머니 뭐 먹고 싶어요? 하고 물으면 피자나 시켜보던가 라고 대답한다. "내는 콜라가 제일 좋다." 몸집이 작아 새모이처럼 밥을 먹는 사람이 콜라 한 잔을 쭉 들이킨다.  


선호가 정분이 씨에게 우리가 만든 책을 선물했을 때도 나는 분이 씨가 사진만 보시겠거니 생각했다. 선호도 그런 의도로 건넸다고 여겼다. 그런데 다음에 분이 씨 집을 찾았더니 분이 씨가 말했다. "니 거기 발리 맞제? 인도네시아." 정분이 씨는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듯했다. 그중에 발리에 간 이야기를 읽고는, 분이 씨가 40년 전에 갔던 발리 생각이 났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발리의 풍경을 늘어놓았다. 정분이 씨가 본 발리 풍경을 듣는 내내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할머니'로 규정짓고 또렷이 보지 않으려 했던 분이 씨의 세계는 얼마나 넓은가. 그곳은 온갖 소리와 원색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노인의 세계는 줄어들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던 어리석은 내 앞에 분이 씨가 80년에 걸쳐 일궈온 꽃밭을 펼쳐놓는다. 여전히 배우고 있는 분이 씨가 40년 전의 발리에 3년 전 발리를 새롭게 얹는다. 내 눈으로 본 세계에 타인의 눈으로 본 풍경을 거리낌 없이 수용한다. "여긴 어데고?" 분이 씨가 묻는다.


그렇게 분이 씨를 만나 4년을 빼곡히 놀았다. 날이 좋은 날은 산책을 하고, 홈플러스에서 두유를 사고, 분이 씨가 좋아하는 맛동산을 찾아다녔다. 분이 씨의 거실은 나를 늘 가수면 상태에 빠지게 한다. 나는 선호가 분이 씨와 하는 얘기를 들으며 반쯤 졸며 버티다가, 결국에는 패배를 선언하고 정식으로 베개를 베고 누워 단잠을 잔다. 거의 매번 빠지지 않고 분이 씨 집에서 2시간씩 낮잠을 잤다. 자는 내 다리를 붙잡고 분이 씨가 계속 얘기한다.


그리고 지난 주말에 분이 씨의 장례식이 있었다. 장례식 전주에 분이 씨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분이 씨는 중환자실에 누워 코에 호스를 연결하고 가뿐 숨을 쌕쌕 몰아쉬고 있었다. 가뜩이나 몸집이 작은 분이 씨가 새털처럼 가벼워 보였다. 분이 씨 귀에 대고 마지막 말을 했다. 고마워요. 아프지 마세요. 편하게 가세요. 고마워요. 할머니 고마워요.


선호의 가족으로 분이 씨를 만나, 인생의 4년을 함께한 것이 나는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하루 종일 화분을 들여다 보고, 꽃 피고 지는 일에 마음을 주는 사람. 밥 보다 단 것이 좋고, 산책 가자는 성화가 귀찮아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 달력에서 예쁜 사진을 보면 가위로 정성껏 오려 벽에 붙여 놓는 사람. 가우디가 만든 건물이 시원시원해서 보기 좋다고 하는 사람. 사랑한다는 말에 얼굴을 붉히는 사람.


어제는 그런 분이 씨 생각에 선호가 엉엉 울고, 그 옆에서 나도 울었다. 우리 둘이 분이 씨 집을 찾을 때마다, 니들이 고생이 많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다. 선호는 한 번도 그 말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고생은 어디에도 없고, 분이 씨를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게 그저 재밌을 뿐이었다. 호시절에 정분이 씨를 만나 실컷 놀고 기억을 새겼다. 분이 씨가 나눠 준 마음을 입고 밖에서 부는 바람을 한결 수월하게 이겨냈다. 작고 불평 많은 아흔 살 나의 친구. 분이 씨가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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