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촉은 사라지지만, 맛은 남는다
마트 초밥 도시락을 꺼낸다.
유통기한은 오늘까지,
가격은 투박한 두 줄짜리 가격표 위에 쓰여 있다.
초밥은 늘 그렇듯 반듯하게 눕혀 있고,
밥은 딱딱하고 찬기가 가득하다.
그런데도 먹을만하다.
간장은 달고, 생선은 얇지만 익숙하다.
싸늘한 밥알을 씹다 보니 문득, 남편 생일에 갔던 오마카세가 떠오른다.
그때 그 셰프는 말수가 없었다.
하지만 손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한 점 한 점을 쥘 때마다,
무게를 저울 대신 손끝으로 가늠하고,
몇 번의 동작으로 밥알을 단단히 모으되,
입 안에서는 흩어질 만큼 느슨하게 쥐었다.
기계로 만든 초밥은 ‘쌓은’ 것이고,
그가 만든 초밥은 ‘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초밥은 드물게도,
손의 감각 자체가 ‘기술’로 평가받는 음식이다.
몇 수법으로 쥐었는지, 밥알의 수가 고르게 맞는지.
너무 세지도, 느슨하지도 않게.
그 모든 판단은 눈이 아니라, 손끝으로 이뤄진다.
촉각이 정확하고도 미묘한 방식으로 맛을 구성하는 드문 예외.
기계는 정확하게 쌓는다.
손은 느끼고, 기억하고, 조절한다.
이 차이는 입 안에서 은근히 드러난다.
한국에서 손맛이라는 말은 여전히 따뜻한 이미지다.
정성, 엄마의 손, 익숙한 맛.
하지만 사람들은 동시에 비닐장갑과 위생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감성적으로는 손맛을 원하면서도,
실제로는 손을 피하는 사회.
그래서 우리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김치에도
“할머니 손맛”이라는 말을 붙인다.
미국은 이 지점에서 훨씬 명확하다.
손은 위생의 적이다.
요리는 철저히 분업되고, 감각은 시스템화된다.
맛은 레시피 대로 정량화되고, 촉각은 주방 밖으로 밀려난다.
그 사이, 한식이나 중식 같은 전통 음식에서는
여전히 손기술이 장인의 감각으로 살아 있다.
수제비 반죽의 탄력, 떡을 만지는 온도,
만두소를 손으로 쪼개 나누는 감.
눈으로 봐선 알 수 없고,
손으로 반복해야만 익숙해지는 것들.
촉각은 가장 아날로그한 감각이다.
우리는 음식을 먹으면서,
그 음식이 어떤 손을 거쳐왔는지는 보지 못한다.
하지만 입 안에서는 어쩐지 그 차이를 느끼게 된다.
누군가의 손이 만든 음식에는,
그 손의 감각이 희미하게 남는다.
기계로 만든 맛이 아무리 완벽해도,
쥔 맛에는 없는 결이 있다.
손이 닿지 않은 음식은 깔끔하다.
손이 닿은 음식은 조금 다르다.
들쭉날쭉하고 불완전하지만,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입은 잊어도, 손이 만든 감각은 남는다.
먹고 나면, 사라진다.
그러나 그 어긋남의 촉감은,
오래 입 안을 떠돌다 가라앉는다.
입에서 시작된 감각은,
때로 기억과 구조로 이어집니다.
‘씹다가 멈칫’은 감각의 흐름을 기록합니다.
이 시리즈는 1편부터 읽을수록 더 맛있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