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진은 천천히 요양병원과 연결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두 병원을 잇는 단순한 통로라기엔 어딘가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나무 사이로 드문드문 비치는 빛이 부드럽게 흔들렸지만, 그의 머릿속은 복잡한 의문들로 가득했다.
길 끝에 있는 재활병원, 그리고 그곳에서 만날 가능성이 있는 SP 그룹의 회장. 모든 단서가 그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유진이 SP 그룹 회장을 만났다면,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엔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아.’
하진은 걸음을 멈추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나뭇잎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쳤지만, 그의 내면은 더 큰 소음으로 울리고 있었다.
‘유진이 회장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무언가를 밝히기 위해 일부러 만난 걸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들은 꼬리를 물었지만, 답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퍼즐 조각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그것들을 맞추기 위해선 더 많은 단서가 필요했다.
하진은 그와 유진이 함께 자랐던 고아원을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고, 그가 유진의 과거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쥔 곳이기도 했다.
고아원은 여전히 과거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어딘가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고아원의 문 앞에 서자, 오래된 나무문과 낡은 건물이 그를 반겼다. 안으로 들어가니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풍경이 펼쳐졌다.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고, 하진은 데스크에 앉아 있던 원장을 찾았다.
하진은 공손히 인사하며 말을 이었다.
“고아원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다시 알려주세요.”
원장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진은 참 깊은 생각이 많았던 아이였던 걸 너도 알지?. 특히,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조용해지곤 했어.”
“유진의 어머니라면… 생모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 유진의 친어머니가 한 번 이곳에 오신 적이 있었거든. 그분은 재혼하셨고, 새로운 가정을 이루셨지. 유진을 데려갈 형편은 아니었던 것 같았어. 새 가족과의 생활이 우선이었던 것 같더구나.”
하진은 그 이야기에 놀랐다.
“그 사실을 유진도 알고 있었던 건가요?”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직접 말한 적은 없어. 하지만 유진은 아마도 스스로 그 사실을 눈치챘을 거야.
그게 그 아이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았겠지..".
고아원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도 많이 혼란스러워 보였어.”
하진은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유진이 어머니가 자신을 두고 새 가족을 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니.
어쩌면 유진이 평생 짊어지고 있던 고독감과 상처의 무게를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장은 조심스럽게 한 가지 더 이야기를 덧붙였다.
“유진이 마지막으로 왔을 때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어.
자세히 묻지는 않았지만, 꼭 어떤 답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듯한 표정이었지.
그게 마지막이었던 거 같아..”
하진은 그 말을 듣고 더욱 강한 결심을 다졌다.
‘유진이 여기서 무언가를 깨달았고, 그것이 그를 SP 그룹과 엮이게 한 걸까?’
그의 머릿속에서 사건의 조각들이 서서히 맞춰지는 듯했다. 유진의 고독, SP 그룹, 그리고 고아원의 연결고리.
하진은 재활병원으로 가기 위해 준비를 마치던 중, 휴대전화가 진동하며 메시지가 도착했다. 보낸 사람은 경찰 동료인 김동수 형사였다.
“하진아, 유진의 노트북에서 분석한 자료가 나왔다. 중요한 내용 같아. 시간 있으면 사무실로 와라.”
메시지를 읽는 순간 하진은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진의 죽음 이후 모든 것이 불투명한 퍼즐 조각처럼 느껴졌는데, 드디어 무언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나타난 것 같았다. 그는 서둘러 동수의 사무실로 향했다.
“왔구나.” 동수는 하진을 보며 파일을 정리하던 손을 멈췄다.
“뭘 찾은 거야?” 하진은 조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동수는 컴퓨터 화면을 가리켰다. “유진의 노트북에서 복원한 파일 중 하나인데, 캘린더와 이메일 기록이 있었어. 그런데... 이걸 보라고.”
화면에는 일정이 표시되어 있었다.
‘결혼 준비 회의 – 다음 주 화요일.’
하진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결혼 준비...? 무슨 말이야?”
동수는 화면을 클릭해 다른 파일을 열었다. 거기에는 이메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혼식 초대장 디자인 초안 검토’
‘파트너와 함께할 인생 계획 회의’
“유진이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야?” 동수가 묻자, 하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 그가 이런 중요한 일을 나한테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고?”
하진은 의자를 뒤로 젖히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진과의 관계는 오래전에 끝났지만, 그 이후에도 둘은 친구로서 중요한 일은 서로에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결혼 같은 큰일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혹시, 그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냈어?” 하진이 물었다.
“그건 없었어. 이메일 내용도 구체적이지 않았고, 관련 파일이 전부 복구된 것도 아니었거든. 하지만...” 동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가 왜 이걸 숨기고 있었는지는 분명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하진은 유진의 생전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항상 신중하고 침착한 사람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중요한 것을 숨길만큼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는 걸 암시하는 것 같았다.
하진은 다시 화면을 살펴보다 캘린더의 또 다른 일정을 발견했다.
‘재활병원 방문 – SP 그룹 관련 회의.’
그는 순간 몸이 굳었다.
“재활병원...?”
동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SP 그룹과 관련된 내용이 이 캘린더에도 나와. 너도 그쪽을 조사하고 있었잖아.”
하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재활병원과 SP 그룹, 그리고 유진의 죽음. 이 모든 것들이 얽히고설켜 있는 느낌이었다.
“근데...” 하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유진이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드러난 걸까? 그가 숨기고 싶었던 건 결혼 자체가 아니라, 그 결혼과 관련된 무언가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