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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량 Feb 13. 2021

넷플릭스 <브리저튼> : 성 교육과 성 역할에 대해

※스포주의


예고편을 봤을 땐 흔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계약연애로 시작했지만 결국 진심으로 끌리게 되는 흔한 서사. 그리고 형제 많은 집안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가득 받고 자란 여자와 외동아들에 부모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한 남자가 만나,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며 보듬어주는 서사. 그렇게 특별할 건 없었다. 하지만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여성으로서, 성적인 생활에 대해. 성을 배우고, 즐기고, 책임지는 일에 대해 참 솔직하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1. 성 교육: 시작과 과정과 결과에 대해


1) 시작: 을 배우는 것


다프네는 그 어떤 여주인공보다 성에 무지했다. 심각할 정도로 아무것도 몰랐고, 더 놀라운 건 처음 받는 성교육이 외간남자를 통해서라는 것이다. 결혼을 하면서도 아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줄도 모르고, 성관계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다. 다프네는 자신의 무지에 대해 깨닫고 엄마에게 하소연한다. 추상적인 비유와 낙관적인 조언만 건넸을 뿐, 중요한 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인 상태로 세상에 내보냈다고. 실제로 결혼식 당일 첫날밤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다프네에게 엄마가 해준 말은 가을비가 땅을 적시듯 자연스러운 거라는 말이었다.


선정적인 화제라고 덮어두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사람으로 살면서 언젠가는 부딪히게 될 부분이 아닌가. 학교에서 받은 성교육엔 실질적인 내용이 없었다. 섹스는 지나치게 선정적이기 때문에 기피해야 하며, 아이를 낳기 위해서만 하는 고귀한 행위여야 한다는 듯 배웠다. 따로 찾아보지 않는 이상, 성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전무했다. 다행이라면, 우리가 정보의 바다에서 살고 있다는 것 정도. 유용한 정보만 찾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정보가 너무 많아 탈이지 않은가. 


여성의 입장에선 이 부분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성에 대해 잘 조언하고 교육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엄마다. 혹은 할머니, 혹은 여자인 선생님. 같은 여자로서, 먼저 인생을 겪었던 사람으로서 정말 현실적인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 부끄럽고 민망함도 있겠지만, 극복하고 말해야만 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앞으로 꼭 부딪힐 부분이니까. 다프네가 엄마에게 원망 섞인 말들을 건네게 되는 것도 이해가 되더라.





2) 과정: 성을 즐기는 것


이 작품에서 눈에 띄었던 또 다른 점은 다프네의 성욕이 솔직하게 묘사된다는 점이다. 청소년 관람불가 딱지가 무색하지 않게 섹시한 장면이 잔뜩이었는데, 다프네는 수동적인 입장이 아니었다. 성에 무지한 다프네가 성에 눈을 뜨고, 그 의미를 알게 되기까지, 그 과정에서 여성의 성욕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묘사한다. 


Gregory Robinson, "Everyone Is Losing It Over The Spoon Licking Scene In Bridgerton" Tyla.


유명해진 숟가락이 하나 있다. 사이먼이 숟가락을 아주 유혹적으로 핥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주 많은 시청자가 운 좋은 숟가락이라며, 그 숟가락이 되고 싶다며 난리를 쳤다. 다프네도 그 모습을 아주 빤히 쳐다본다. 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혀뿐만 아니라, 다프네는 사이먼의 근육도 아주 흑심을 제대로 담아 본다. 윌 몬드리치의 경기 중 사이먼이 소매를 걷어붙이자 다프네는 사이먼의 팔 근육에 시선을 떼지 못한다. 이 장면을 슬로우 모션에 클로즈업으로 제대로 보여준다. 첫날밤에도 사이먼이 옷 벗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다 벗고 나서도 가슴에 시선을 못 뗀다. 남성의 성적인 모습을 향해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여성의 시선을 카메라가 착실하게 따라가준다. 정말이지 이 작품은 너무나도 솔직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다프네가 자위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청불' 딱지를 달고 나온 작품에서 여성의 신체가 선정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자위행위를 묘사한 작품이 얼마나 있을까. 다프네에게 이걸 알려주는 사람이 사이먼이란 게 웃기긴 했는데, 딱히 특별하지도 큰일날 것도 없다는 듯이 가볍게 말하는 사이먼의 말투가 참 마음에 들었다. 당연히 할 수 있을 만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여성이 성욕을 드러내고, 심지어 스스로 즐기기까지 한다는 것에 대해 단 하나의 죄책감도 없는 게 쉬운 일일까? 여성의 성욕은 마치 드러내면 안 되는 것, 있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헤픈 여자 꼬리표를 달게 되는 것이다. 나를 비롯해 주변의 많은 여성들이 성욕에 죄책감을 느낀다. 잘못을 저지르는 기분이랄까. 이 죄책감을 달래기 위해서 친구들과 수없이 대화해야 했다. 이상한 일이 아니고,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 여러번 되뇌이고 나서야 비로소 죄책감을 덜어갈 수 있었다. 혼자서는 어려운 일이다. 여성의 성욕은 분명하고, 스스로 즐기는 것도 자연스럽다. 이 작품에서 솔직하고 담백하게 전하는 말이었다. 적어도 여기에 죄책감은 느끼지 말자는 것. 





3) 결과: 성을 책임지는 것


성에 대해 배우고, 즐긴 이후에 맞이할 수 있는 결과 중 하나는 임신이다. 임신에 대해서는 마리나라는 인물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임신은 했는데, 남자에게 연락이 없는 최악의 상황이다. 그리고 마리나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고민하고 시도한다. 아주 영악하게 시도하며, 이기적으로 구는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다. 그런데 마리나의 입장에서 보면 마냥 미워할 수 없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거라는 그의 말도 맞다. 다 늙은 할아버지에게 팔려가듯 결혼하지 않기 위해, 이미 벌어진 상황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 거니까. 이미 임신은 했고, 남자는 연락도 없고, 도와주거나 대안을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사회적 통념상 결혼이 절실한 상황에서 행복의 가능성을 보여준 건 콜린뿐이었다는 그 말에 같이 울었다.


아이 아빠인 조지의 죽음을 알았을 때 마리나는 그 죽음에 애도하기도 전에 아니라 자신이 버려진 게 아니었다는 것,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 그 마음이 진심이었다는 것에 안도했다. 남자가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과 아이가 부정당하지 않았다는 것, 아이의 존재가 원망과 배신감, 절망으로 얼룩지지 않아도 되는 것을 의미하니까. 임신과 출산 앞에서 여성은 남자의 행동에 따라 안도할 수 밖에 없는 수동적인 입장이었다. 물론 집안의 명예를 중시하고, 여성이 돈을 벌 기회가 적은 시대적 배경 탓이겠지만. 동시에 마리나는 자신의 행복과 생존을 위해 열심히 발버둥친 능동적인 인물이었다. 




2. 성 역할: 각자 정해진 역할에 대해


여성의 성생활에 대해 솔직하고 담백하게 풀어낸 것 외에도, 주연이든 조연이든 인물마다 각자의 서사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뚜렷한 성역할과 의무 아래에서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꾸려갈지 열심히 고민하는 인물들이었다. 주인공인 다프네는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역할을 아주 충실히 잘 해내는 인물이라 그 안에서 스스로의 행복을 잘 찾아낸다. 그래서 오히려 사회적 역할과 개인적 욕심이 상반된 다른 인물들의 고민과 노력이 눈에 띄더라. 



1) 가부장적 인물

앤소니는 미우면서도 안쓰러웠던 인물이다. 앤소니는 초반부터 다프네의 의견을 묵살하고 제멋대로 판단하는 가부장적인 인물이라 불편했지만, 보다보니 안쓰러운 인물이다. 아버지 여의고 가장이 되었는데 가장에게 기대되는 역할이 한없이 무거웠던 것이다. 앤소니는 시에나라는 오페라 가수를 사랑했는데, 자작으로서 용납되지 않는 사랑이다. 엄마는 다프네에게 왕자보다 사이먼을 권유할 정도로 딸의 행복과 사랑을 살펴보았지만 앤소니의 사랑에는 가차없이 굴었다. 앤소니의 시선이 시에나에게만 향하는 걸 아는데도 언급 한번 없이 적당한 지위의 혼처를 골라 소개해준다. 물론 신분 차이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큰아들에게 주어진 가장이라는 역할과 의무가 참 버거거웠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조금 독선적으로 행동하게 되기도 하고, 스스로 중심을 잡지 못해 갈팡질팡하기도 한다. 고정적인 성역할에 분명 힘들었을, 그리고 힘들어 할 인물이다. 결국 앤소니는 시에나를 포기하게 되는데, 앞으로 앤소니가 가장의 역할을 해나가면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다.(2편에서도 이런 가부장적 역할의 대표적 인물인 앤소니의 고민과 방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점이 흥미롭다.) 



2) 사회적 의무에 저항하는 인물

다프네 동생, 엘로이즈는 사회적 의무를 거부하는 목소리가 가장 큰 인물이었다. 엘로이즈는 글을 좋아하고 공부를 하고 싶어한다. 다프네가 사회적 의무를 수용하고 최선을 다해 그 의무를 다하려고 한다면 엘로이즈는 사회적 의무에 얽매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강하다. 언니가 완벽해서 고맙다는 엘로이즈의 말에 다프네와 엘로이즈의 차이, 그리고 엘로이즈가 원하는 바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딸로서의 의무가 다프네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하지만, 엘로이즈가 감당해야 하는 벽은 여전히 견고하다. 둘째오빠 베네딕트도 엘로이즈와 비슷하게 개인적인 꿈을 그리고 있는데, 화가의 작업실에도 자유롭게 드나들며 그림에 대한 관심을 추구해나갈 수 있다. 하지만 엘로이즈의 벽은 더 견고하다. 목이 파인 옷을 입고 무도회에 나가는 걸 피하지 못하고, 공부를 시작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사교와 결혼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한다. 레이디 휘슬다운을 일하는 독립적인 여성이라며 동경하고, 자신도 주체적으로 살고 싶다고 똑부러지게 말한다. 배우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는 강단 있는 이 역할과 매우 잘 어울렸다. 앞으로 엘로이즈가 어떻게 성장할지 참 기대가 된다.





성역할이 뚜렷한 가운데 사회적 의무와 기대 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꾸려가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흥미롭다. 뿐만 아니라 동성애자, 인종 등의 문제까지 한번씩 지긋한 시선을 던져주고 지나가는 것도 마음에 쏙 들었다. 헨리 그랜빌의 대사로 짧게 전한 게이의 심정과, 사이먼과 레이디 댄버리, 왕비를 통해 보여준 인종 다양성까지. 굵직한 스토리 다루면서 언급해주는 걸 잊지않고 챙겨준 느낌. 한 기사에서는 다양성을 다룬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LGBTQ+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가볍게 다뤘다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난 오히려 덕분에 연애, 성생활, 결혼, 임신, 출산에 이르는 여성의 삶을 긴밀한 시선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결혼이란 견고한 의무를 각자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가는지 살펴보는 재미도 있었다. 브리저튼은 사랑하기로 했고, 페더링턴은 사랑을 줄 수 있는 다른 요소를 찾았고, 그랜빌은 결혼이 줄 수 있는 사회적 안정감을 겉으로 내세우며 서로 합의와 존중 하에 원하는 삶을 추구한다. 다양한 삶의 방식이었다.


요즘 작품답게 여러모로 다양성을 추구하기도 했고, 여성의 시각이 많이 드러났다는 점에서도 만족스러웠다. 주인공에게만 매력이 집중되지 않고 인물들의 매력이 각각 살아나면서도, 주인공을 통해 전하는 굵직한 메시지도 솔직하고 분명하게 다가왔다. 즐겁게 감상한 작품이었다. 새로운 시즌에서 보여줄 인물들의 성장과 또 다른 메시지가 매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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