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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량 Mar 18. 2023

엘리자베스 문, 『어둠의 속도』

*결말 언급하니 직접 읽고 싶은 분들은 주의해주세요.


자폐증을 고칠 수 있는 세상에서 자폐증이 과연 고쳐야 하는 대상인지를 묻는 작품. 많은 생각이 들어서 무려 여섯 가지로 정리했다.




1.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선이 얼마나 무의미한가


전반적으로 이 작품은 현실적이었다. 자폐인 주인공 루는 비장애인을 '정상인', 자신을 '비정상인'이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자폐인의 한계에 대해 냉정하리만치 잘 알고 있다. 좋아하는 마저리에게 저녁식사를 청하지 않고(못하고), 토너먼트에 나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등 스스로의 행위를 제지한다. 장애를 기준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고, 그 경계선으로 장애인의 모든 활동을 제한하는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나의 한계는 현실이었고, 내 삶의 테두리에 그어진 변하지 않는 굵고 검은 선이었다."


루의 독백 중에는 자신이 비장애인처럼 행동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그들과 같아질 수 없어 슬프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루는 사람들과 의사소통도 잘하고, 친구들도 있고, 취미도 즐기고, 사랑도 한다. 심지어 적성에 맞는 직업도 갖고 있다. 그리고 완벽하게 업무를 수행한다. 루의 일은 알고리즘을 만들고 패턴을 분석하는 업무인데, 자폐인의 특성과 꼭 들어맞는다. 루의 일상이 비장애인과 특별히 다를 게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협소한 기준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가르고 있었던 것일까?

"자폐인들이 냄새에 너무 민감하다고 쓰인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아무도 개나 고양이의 민감한 후각은 거북해하지 않는다."

"자폐인들이 작은 소리에 너무 민감하다고 쓰인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아무도 동물들을 거북해하지 않는다."




2. '다름'이라는 말의 뜻


소설을 읽다보면 루의 자폐적 '증상'을 루만의 특별한 성격 또는 정체성으로 인식하게 된다. 루가 구축해놓은 일상의 규칙과 흐름이 상세히 묘사되며, 루가 루만의 방법으로 삶을 구성해가는 모습을 차근히 따라가게 된다. 루의 삶을 지켜보면 그의 일상은 장애인의 일상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일상으로 다가온다. 루는 세상을 아름다운 공간으로 바라보고, 그만의 방식으로 풍부한 의미를 두고 살아간다. 빛이 색을 반사하며 공간을 알록달록 채우는 모습을 응시하고, 각각의 색이 담고 있는 감정을 묘사하는 걸 보고 얼마나 감탄했는지 모른다. 


'다르다'는 것은 서로 하나의 방식으로서 존중한다는 뜻이다. 루의 방식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톰은 루가 스스로 펜싱을 터득해나가는 방법을 설명하지 못하자 이렇게 말한다. "상관없어. 너는 지금 훌륭한 선수야. 사람들은 확실히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배우는구나."


*예진님 한 마디: 루가 세상을 감각하는 방식은 아름다웠다.




3. 장애인이라는 어엿한 사회인


루에게 직업이 있다는 부분이 특히 중요하게 다가왔다. 자폐인이 의존적인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경제활동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비장애인과 서로 도우며, 아니 비장애인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특히 우리가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똑바로 지적하는 듯했다. 장애인을 당연스럽게 의존적이고 부족한 존재로 정의해버리는 시선 말이다. 작중 돈이라는 인물이 그랬듯이,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성실함을 비웃고 성취를 경시한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권모술수가 생각나는 인물이다. 어쩌면 장애인을 중심으로 한 서사에서 필요한 인물군일지도 모른다. 이들이 장애인 주인공에게 가하는 폭력은 장애인이 받는 불합리한 대상화를 수면 위에 올려놓으니까. 


고등학교 같은 반 친구였던 J가 자꾸 떠올랐다. J의 정확한 진단명은 모르겠지만, 아마 자폐였던 것 같다. 명절 때면 항상 연락해서 안부를 물어주는 아주아주 고마운 친구다. J는 항상 열심이었고, 긍정적이었고, 의욕적이었다. J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유통업계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아마 내가 보았던 그때 그 모습처럼 언제나 의욕적이고 성실하게 일하고 있을 것이다. 그 어느 비장애인에 뒤지지 않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다. 취업도 어려운 이 시대에 무려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멋진 친구다. J는 돈이나 크렌쇼 같은 사람들은 절대 만나지 않고, 톰과 루시아와 마저리 같은 사람만 잔뜩 만나면서 행복하게 일했으면 좋겠다. 



4. 비장애인의 방식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루는 세상을 곧이곧대로 바라보아서, 루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종종 내가 사는 방식도 새롭게 바라보게 될 때가 있었다. 예를 들어, "실수를 그렇게 많이 하지도 않았어"라는 말을 두고 루는 얼마나 많은 실수가 '그렇게 많은' 실수인지 고민한다.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관용구도 직관적 의미와 함축적 의미에 대해 고민한다. 예전에 다들 남발하는 '사랑'이라는 말은 오염되었다는 표현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었는데, 그와 비슷한 느낌이다. 우리가 평소에 쓰는 언어는 참 많이 왜곡되어 있지 않은가. 


루의 올곧은 사고방식은 언어뿐만이 아니라 많은 부분을 반성하게 만들었다. 루는 회사 상사의 권위와 권력에 복종하는 비장애인들의 모습을 보고 의아해한다. "나는 왜 정상인인 올드린 씨가 크렌쇼 씨를 그런 식으로 따라가는지 모른다. 크렌쇼 씨를 무서워하는 걸까? 정상인들도 다른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무서워할까? 만약 그렇다면, 정상이라서 좋은 점이 뭘까?" 루의 시선은 비장애인의 규율이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여지 없이 드러낸다. 같은 방식으로 사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당위를 얻은 것뿐이다. 비장애인의 방식은 다수의 권력일 뿐. 정상적 사회화는 다수에 의한 강요일지도 모른다. 즉, 비장애인과 대화하고 행동하는 양식이 다르다는 것은 누군가를 차별할 근거조차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아무도 옳다고 말할 수 없다. 


"가끔은, 바보처럼 춤춰대는 채소들이 지루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자폐인이 보기에 비장애인의 삶은 바보처럼 배운대로만 규격에 맞춰 살아야하는 삶일지도 모른다. "정상인들이 다른 사람이 취하는 행동의 이유를 언제나 이해하지는 않는다." 솔직하고 바른 루의 시선을 빌려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면 참 부끄럽다. 



5.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구분


루는 펜싱을 즐긴다. 펜싱 선생님이자 친구인 톰의 제안으로 토너먼트 경기에 나간다. "나는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서 정상인처럼 경기했다." 루는 자신의 장애가 어떤 차이도 빚어내지 않는 공간을 경험했다. 이후 같은 자폐인들이 모인 지원센터에 간 루는 이렇게 독백한다. "지난 주 이 시간에 나는 토너먼트장에 있었다. 토너먼트는 확실히 즐거웠다. 여기보다는 거기 있고 싶다. (...) 내가 속한 장소는 그곳이다. 나는 더 이상 여기에 소하지 않는다. 나는 변화하고 있다. 아니, 변화했다." 


자폐인지원센터는 "'정상인'에 가까워지기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라고 권한다"고 했다. 그리고 루의 한계를 규정하고 제한하는 같은 자폐인 친구가 있다. 반면 토너먼트장은 루가 온전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곳이다. 과연 장애인이 활동하는 공간과 비장애인이 활동하는 공간을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자폐인을 자폐인으로 대하는 것이 오히려 차별적일 수 있으리란 생각을 했다. 


*예진님 한 마디: 그룹을 호명하고 분리하는 순간 특수해진다. 



6. 장애인이라는 고유한 정체성


루가 장애인에서 비장애인이 되어버렸다는 결말은 루가 자폐인으로서 느끼는 사회적 한계 때문에 결심했다는 점에서 가장 현실적인 흐름이다. 루의 자발적인 의지이기 때문에 유의미하다.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울 수 있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는 루의 말이 있는데, 누가 어떻게 말리겠는가? 불확실한 미래 앞에 현재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직시하는 루의 모습은 스스로 삶을 직접 구성해가는 어엿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루가 더 이상 자폐인이 아니게 되었을 때, 나는 큰 상실감을 느꼈다. 내가 알아온 루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느낌이었고, 이전의 루를 다시 만나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쉬웠다. 특히 마저리에 대한 성애적 감정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루의 변화가 가장 도드라져보였던 것 같다. 나는 루의 일상과 성격과 생각과 살아가는 방식 모두를 통틀어 루라는 인물을 이해하고 있었고, 애정을 주고 있었다. 이 결말은 내가 소설을 읽으며 루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확연히 깨닫게 해주는 장치였다. 

"그러니까, 자폐증을 앓는 게 좋다고요?" 의사의 목소리에 꾸중하는 듯한 어조가 섞인다. 그는 나 같은 사람이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나는 나 자신이기를 좋아합니다. 자폐증은 나 자신의 한 부분입니다. 전부가 아닙니다."


자폐인이라는 사실이 정체성이 되는 순간, 이건 개인의 자아를 구성하는 특성 중 하나가 된다. 큰 소리를 무서워하거나 정해진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을 불안해하는 등의 자폐적 증상은 더 이상 병리적 증상이 아니었다. 그저 루를 구성하는 특징일 뿐이었다. 그래서 루가 비장애인이 되었을 때, 루를 잃은 것과 같은 탄식이 터져나왔던 것이다. "내가 정상이 아닌 점들을 생각해 보면, 정상이면서 지금과 같은 사람인 나를 상상할 수가 없다."





결국 이 결말 자체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장애는 사람의 정체성이 될 수 있는가. 한 사람의 특별한 개성처럼 여길 수 있는가. 그렇다면, 장애는 과연 고치고 없애야 할 대상인가. 예전에도 내가 글에서 인용한 적이 있는데, 유튜버 원샷한솔 님의 말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리에 둥둥 떠다녔다. 장애가 아니라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포용성이 놓여있다는 것은 민음사 유튜브 채널을 보다가도 느꼈다. 한 영상에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소개해주었는데, 집단의 규칙을 따르지 않고 개인의 유별난 욕구에 집중한 삶을 살아가는 '몰리'라는 캐릭터가 바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는 설명이었다. 다양한 삶의 군상을 포용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출발이라고. 이렇게 개인의 다양한 정체성을 아우를 수 있는 넓은 세상이 궁극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방향일 것이다. 루처럼 장애를 그 사람만의 특별한 정체성으로 인식하게 된다면, 바뀌어야 하는 것은 개인의 정체성이 아닌 사회다. 


제목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이따금씩 루는 어둠의 속도에 대해 고민한다. 소리보다 먼저 정적이 있듯, 어둠도 항상 빛보다 먼저 존재했다고. 왜 자꾸 어둠의 속도에 대해 고민할까. 이 책에서 폭로하는 사실은 우리가 장애인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 항상 옳지는 않다는 것이다. 루도 자신이 '정상인'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 늘 옳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우리는 세상의 많은 부분을 훤히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는 것 외에는 모른다. 빛이 아무리 비춰도 어둠이 존재하는 것처럼. 루는 어둠을 무지에, 빛을 앎에 빗대곤 했는데, 항상 어둠과 무지의 속도가 더 빠르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빛이 주인공인 듯한 세상에서, 빛보다 더 많은 세상을 채우고 있는 어둠을 조명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어둠이 빛보다 먼저 존재하고 있었고, 빛에 못지 않은 존재감을 자랑한다고. 우리가 쉽게 잊고 외면하는 부분이 세상 구석구석을 관통하는 진리일지도 모른다. 






이후는 독서모임의 기록이다. 혼자서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다양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1. '올드린'이라는 인물의 재조명


올드린은 소시민적 인물이다. 작품에는 평면적인 악역이 두 명 등장하는데, 그중 크렌쇼는 루를 비롯한 자폐인 직원에게 장애를 없애는 불확실한 수술을 강요하고 퇴사를 종용한다. 올드린은 자폐인인 형을 두고 있어 자폐인의 현실을 이해하나 자신의 입지로 인해 적극적으로 루를 도와주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아이러니하게도 루와 크렌쇼로부터 똑같은 말을 듣는다. "노력이 아니라 행동을 하세요." 라는 말을. 루와 크렌쇼 누구 편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우유부단하고 계산적인 인물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현실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놀라운 건 루와 크렌쇼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올드린이 톡톡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히어로가 될 필요까진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앞날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소시민이지만, 그게 아무것도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2. 장애의 선택에 대해 논의할 자격


현진이는 연극 <태양>을 소개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우월한 집단과 열등한 집단을 구분한 사회가 배경이었다. 전자는 '녹스', 후자는 '큐리오'였다. 『어둠의 속도』와 비슷하게 어떤 조치를 통해 큐리오는 녹스가 될 수 있었다. 작중에는 녹스인 인물과 큐리오인 인물의 대화가 나오는데, 녹스인 인물은 녹스가 되어봤자 허망할 뿐이라면서 큐리오는 그대로 지켜져야 한다고 말한댔다. 어떻게 보면 큐리오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느낌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큐리오의 한계를 강요하는 말처럼 들린다. 현진이는 비장애인인 우리가 루에게 바뀌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질문했다. 기득권인 집단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그 또한 폭력적일지도 모른다고.



3. 비장애인보다 빛나는 자폐인의 사회성


현실이나 작중이나 자폐인은 사회성이 다소 떨어지는 것으로 보여지나, 예진님은 루가 얼마나 상대방을 살피는지에 주목했다. 루는 스스로 자폐인이기에 가지는 부족함을 잘 인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오히려 더 타인을 면밀히 살핀다. 상대의 말에 경청하고, 상대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으며, 상대가 기분 나빠하지 않을 말을 고르고, 상대를 배려한다. 루의 방식은 조금 다를 뿐,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4. 이 작품이 우리의 무엇을 바꾸었는가


사실 루의 이야기만으로는 자폐인의 처우에 대해 보편적으로 논의하기 쉽지 않다. 작중 올드린의 형이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배우 문상훈이 맡았던 역할을 생각해보면, 자폐는 매우 증상이 다양해서 사람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그렇다면 홀로 생활하기 어려운 자폐인의 경우에는 루가 받았던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린 말문이 막혔다. 


이 책을 통해 자폐인에 대해 더 세세하게 알게 된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솔직히 털어놓자면 지하철에서 종종 자폐인을 마주치게 될 때 무서워하지 않으리란 자신은 없다. 특히 남성인 자폐인일 때. 책이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자폐인은 통제된 시나리오 내에서 움직이지만, 실생활에서 마주하는 자폐인은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른다. 그 예측불가능성이 일말의 공포심을 야기한다. 자폐인의 증상이 다양하다는 점도 그 예측불가능성을 더한다. 루와 내 친구 ㅈㅅ이는 다정하지만, 현진이가 만났던 한 자폐인은 폭력적 성향을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이건 내가 여성이라는 약자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듯하다. 나보다 신체적 힘이 우위에 있다면 어느 누구든 완전히 마음 놓을 수는 없을 테니까. 



5. 변화에 대한 추구


다들 결말에 대해 의아해하고, 아쉬워했다. 루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음에도, 그리고 자폐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비장애인이 되는 것을 선택했다. 현진이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것과, 더 발전하고 싶다는 생각은 공존할 수 있는 것일까? 루는 이 두 가지 모습을 모두 보였다. 어쩌면 우리도 그렇다. 지금의 나를 좋아하지만, 앞으로 더 나아질 거란 기대와 가능성을 품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루의 결정은 아쉽고 놀라울지라도 그 자체로 빛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6. 루의 수술 전후  


수술 이후의 모습을 보면, 루에게는 수술 이전의 루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렇다는 건 변화된 루는 이전의 루에서 사회적 능력만 일부 터득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이 작은 변화로 루는 민증에서 장애인이라는 표시가 지워지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환경을 얻었다. 더 이상 펜싱을 하지 않고, 마저리를 좋아하지 않는 루를 보며 우린 실망하고 상실감도 느꼈지만, 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맞이한 변화일지도 모른다.



7. 제목의 의미


중간에 루가 '왜 꿈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 가득한가요'라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맥락은 수면 속 꿈이었지만, 만약 미래에 대한 꿈이라고 해석해보면 의미가 특별해진다. 어둠은 무지고, 알 수 없는 미래에 해당한다. 빛은 앎이고, 우리가 인지하는 현재에 해당한다. 그래서 항상 어둠이 빛보다 앞선다. 루는 수술 전에는 어둠이 빛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불편해했지만, 수술 후에는 더 이상 불편하지 않다고 했다. 오히려 더 뻗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기꺼워했다. 수술 이후에 루는 우주를 배우고 알아가고 싶다는 꿈을 쫓아가고 있다. 빛보다 앞선 어둠이 어둡지 않을 수 있는 건 우리가 꿈을 꾸고 변화된 미래를 기대하기 때문이 아닐까. 




함께 대화한 덕분에 이야기 구석구석을 살피며 의미를 재조합해볼 수 있었다. 즐겁고 재미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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