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희량 Mar 18. 2023

<에놀라 홈즈> : 여성의 가능성을 품은 고전의 재해석

셜록 홈즈의 팬으로서, '홈즈'라는 이름이 등장하면 거부할 수 없다. <에놀라 홈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막내 여동생이라니? 흥미로운 설정이었다. 베이커가 221B도 나오고, 모리아티도 나오고, 왓슨도 나오고. 셜록홈즈 원작의 구도를 차용해가는 모습을 보니 더 열광하며 볼 수 있었다. 홈즈와 여성 서사의 조합이라니 기가 막힌 아이디어다. 몇 가지 눈에 띄는 부분들이 있어 기록해본다. 

1.
에놀라는 셜록의 그늘에 숨으려 하지 않는다. 버럭버럭 소리 지르는 중년 남성 앞에 눈물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절대 굽히지 않는다. 과대해석된 채 굳어진 남성성 앞에서 나약해보일 수 있으나, 절대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여성의 강인함을 보여준다. 유도리아외 이디스와 에놀라가 남자 경찰들을 다 때려눕히는 장면은 무지 짜릿했다. 1편에서도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과격하게 싸우는 모습을 암시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이런 장면은 매체에 더 자주자주 나와서 더 많은 사람들이 여성의 힘과 가능성을 실감하게 해줘야 한다. 배우고 훈련하면 여성도 얕볼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걸 알게 해줘야 한다. 얼마 전, 여성 흡연자인 내 친구는 남성 흡연자들 한가운데에서 공무원한테 콕 집혀 벌금을 뜯겼단다. 여성 운전자인 내 친구는 교통사고가 났을 때 경찰관이 상대 남성 운전자의 말만 믿었단다. 100% 상대과실이었다. 아직 더 많이 필요하다. 또 다른 에놀라, 또 다른 블랙위도우의 강인한 모습들이. 


2. 

제임스 모리아티를 여성으로 등장시킨 것은 천재적인 발상이다. 모리아티는 악랄한 범죄자인 동시에, 매우 치밀한 지능적인 인물이다. 즉, 범죄와 지성이라는 남성중심적 영역에서 군림하는 인물이다. 그러한 인물을 여성으로 치환했을 뿐만 아니라, 똑똑하고 유능한 여성으로서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질문하는 인물로 나타냈다.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체제에 대한 강렬한 반감을 가지고 지능적인 범죄 플레이를 펼치는 인물. 심지어 셜록 홈즈와 맞붙는 인물. 짜릿하다. 셜록홈즈라는 고전적인 남성 영웅 서사를 어떻게 이렇게 재해석할 수 있는지. 앞으로 모리아티의 활약를 어떻게 펼쳐줄지 기대된다.


3. 

2편은 특히 더 먹먹했다. 세라 채프먼의 실화를 바탕으로 당시 여성 노동자의 고통을 비춰주었다. 원가절감을 위해 유해물질로 원료를 바꾼 공장에선 자꾸만 여성 노동자들이 죽어나갔고, 이 사실을 폭로를 위해 애쓰다가 결국 실패하는 모습이 통탄했다. 하지만 진실을 외쳐서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한 목소리를 내는 모습에 목구멍이 콱 막혔다. 권력 앞에 무너졌지만, 무너지지 않은 모습. 현실의 벽 앞에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함께라서 할 수 있었을 결정들. 지금도 가슴 아픈 소식들은 꼭 한번씩 들려오는데, 언제쯤 우린 피와 눈물 없이 세상을 가동할 수 있을까?


4. 

튜크스베리가 한 말 중 너무 인상 깊은 대사가 있었다. 자기가 하는 일은 매순간이 타협이라고. 정말 중요한 안건을 위해서는 폐수를 무단 방류하는 것에 찬성해야 한다고. 그래야 상대 진영도 자신의 안건에 찬성표를 던져준다고. 난 그동안 정치인에 대한 강렬한 불신감만 느껴왔는데, 그들이 완전무결하지 않은 점을 탓해왔는데,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음을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세상은 흑백이 아니고, 설령 인간의 편의상 흑백으로 나누더라도, 항상 흑일 수도 백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 '소녀' 에놀라가 어떤 성장을 보이고, 제한적인 사회체제와 고정관념을 극복해나갈지 기대가 된다. 물론 제임스 모리아티도. 매번 셜록에 열광해왔지만, 셜록이 에놀라의 서사에서는 어디까지나 조력자의 위치일 뿐이라는 것이 또 다른 쾌감을 선사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엘리자베스 문, 『어둠의 속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