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에 대한 스스로의 욕구를 이해했다.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질서화를 추구했던 것 같다. 동시에 분류에 대한 욕구는 욕심이자 오만이란 것을 깨달았다. "모든 분류는 분류의 대상이 아닌 주체의 편의를 위한 것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폭력성을 수반한다."
분노를 느꼈다. 조던의 폭력적인 행태에 화가 났다.
작가는 '너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에 불안하고 두려워했지만, 나는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고, 아니어도 된다는 사실에 해방감을 느꼈다. "물에 들어가는 게 가능할 때마다 큰 배로 풍덩 수면을 치며 물속으로 뛰어든 아버지"의 모습이 자유로워 보였다. / 언어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이 책을 읽을 때, 애인은 옆에서 언어로 분류하고 정리하는 데이터 관련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우리가 언어의 정의와 함축과 분류가 가져오는 폭력성을 고발한다고 해도, 우린 과연 거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 모두가 틀릴 수 있다는 것에 확신을 주었다. 그리고 여기서 해방감을 느꼈다. 우린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세계에 관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또 뭐가 있을까?",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이 책은 내일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책이다. 너무나 희망찬 책.
겸손의 가치를 배웠다. 나를 숙이는 겸손이라기보다는,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옳은 게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겸손이다. 오류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만, 책에서도 말하는 자기 기만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비판에 대한 필요성을 실감했다. 편향되지 않기 위해서는 비판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종교는 비판에 취약하다고 했다. 이는 곧 호도와 맹신으로 이어진다고. 반대의 의견을 듣지 않으면, 먼 산으로 흘러가기 쉽다. 어쩌면 <더 글로리>의 하도영처럼 이쪽 저쪽 모두 묻고 다니는 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일지도 모른다.
평소에 구분 짓거나 명명하는 걸 경계하는 편이라, 물고기가 없다는 사실이 충격적으로 와닿지는 않았다. 다만, 자기중심적 시각에서 조금은 벗어난 듯하고, 존재에 대한 낙관적인 시각을 얻었다. 긍정 또는 부정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미지의 대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학문도 존재 위에 있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언어와 분류와 정의보다 존재가 더 우선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동양인'보다 먼저 사람으로 존재한다.
편협된 사고를 갖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더더욱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도.
공부하거나 이해할 때 분류와 체계화 작업은 필수다. 책 한 권을 읽어도 목차를 바탕으로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어쩌면 '분류'라는 방법은 우주의 무질서를 수용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가 만들어낸 방법이 아닐까.
우리는 정의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다. 정의, 규칙, 체계. 우린 아마 벗어날 수 없지 않을까.
난 분류, 정의, 명명에 미쳐있다. 감정도 언어로 명명할 수 없으면 혼란스럽다. 일기장에 감정의 이름을 적고 나서야 편안해짐을 느낀다.
미지의 대상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에 공감한다. 따라서 명명하는 순간 편안해진다. 김초엽의 단편소설 『감정의 물성』에서 감정의 돌을 쥐는 순간 스스로의 감정을 이해하고 실감하고 심지어 안심하게 되는 것처럼.
어떻게 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 치열하고 깊숙하게 파고들 수 있는지 그 원동력이 궁금하다.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지만, 어떻게 이렇게나 열정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을까. 어쩌면 평생의 궁금증을 해결해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나가는 것 자체로 원동력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라는 이유로 완전한 도덕성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작가가 바람 피운 사실을 고백할 때 일종의 배신감과 같은 감정을 느꼈지만, 책을 읽을수록 작가가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했기 때문에 책의 이야기가 더 진실되게 다가온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조던의 폭력성도 자신의 실수와 오류와 부족함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이 이야기를 하게 될 거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어쩌면 '분류'라는 키워드 아래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만한 소재다. 우리는 사람을 16가지로 분류해서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상대방을 '간단히' 이해하기에 아주 편리한 방법이지만, 이로 인해 불편했던 경험을 공유했다. 상대방이 나를 지나치게 납작하게 이해하거나, 자기가 이해한 대로 나를 정의한 경험이다. 분류는 인간이 편리를 추구한 수단이지만, 예외를 아우를 수 없고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기 쉽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우린 모두 분류의 일방향적 폭력을 깨달았고, 이야기를 나누며 더 깊이 공감했다. 한 친구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앞으로도 언어의 정의와 분류가 가진 오류를 벗어나기는 힘들겠지만, 인식하고 있다는 것 자체로 유의미할 것이다. 더 조심하고 주의할 테니까.
함께 독서모임을 한 친구의 리뷰를 공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