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책을 읽고 나서 보시길 권장합니다.
글쓰기에 대한 책이라는 소개를 받고 시작했다. 처음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마주친 건 어딘가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한 고래에 대한 글이었다. 직접적인 문장으로 글쓰기를 고찰하는 책이 아니었다. 고래의 글을 끝으로 환생에 대한 글이 시작하니 비로소 여러 단편의 산문을 모아놓은 책임을 알아차렸다. 이렇게 한 단락씩 미끄러지며 차츰차츰 이 책을 파악해갔다.
세 장으로 나뉘어진 책의 구조는 선명했다. 첫 번째, ‘갈망의 글쓰기’에서는 삶과 세상에 대한 글이 실렸는데, 무언가를 믿고 추구하고 갈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두 번째, ‘관찰의 글쓰기’는 타인에 대한 글이다. 어떤 글 작가 또는 사진 작가를 두고 길고 긴 글을 써내려갔다. 세 번째, ‘거주의 글쓰기’는 저자 자신에 대한 글이다. 저자의 부모와 형제, 연인, 자녀가 등장하며, 저자를 둘러싼 삶을 돌아본 글이다. 독서모임에서 이 구조에 대한 다양한 생각이 나왔다. 누군가는 3장을 읽고 비로소 이전의 모든 글들을 이해하게 되었다면서 3장을 가장 흥미로운 장으로 꼽았고, 누군가는 몰입감 있게 첫 시선을 휘어잡은 1장을, 그리고 나는 저자의 통찰력에 가장 감탄했던 2장을 꼽았다. 우리는 대화 끝에 글의 배치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세 장의 구분은 ‘세상 - 타인 - 나’라는 점차 줄어들어가는 시야를 나타냈고, 긴밀해지는 시선을 보여주는 구조다.
저자는 어떤 현상의 이면을 선명하게 꿰뚫어본다. 그리고 양면적인 세상을 균형적으로 담아낸다. ‘52 블루’라는 고래에 대한 글은 사람들이 외로운 고래에 자신을 투영하고 위로 받는 이야기였으나, 동시에 스스로의 욕망과 집착을 대리하기 위해 투사하는 것뿐이라는 시각을 함께 보여준다.
환생을 믿는 사람들의 글 속에서는 환생이 암시할 수 있는 아이러니한 사실에 주목한다. 환생은 자아가 변화할 수도 지속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하는데, 이는 현재의 삶 속에서도 가능한 ‘회복’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도 있다는, 삶의 연속성이 품은 가능성 말이다. ‘Life goes on’이라는 말은 오늘의 패배가 내일의 승리로 뒤집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하지 않나. 현재의 삶이 아닌 삶을 사유함으로써 현재의 삶이 가진 강렬한 성질을 짚어내고 있다.
‘심 라이프’라는 글은 가상현실을 즐기는 사람들을 통해 현실과 가상현실의 관계를 고찰한다. 가상현실에서 현실의 한계를 극복한 장애인과 트랜스젠더의 사례는 그 세상의 무한한 가능성을 나타내지만, 가상현실은 현실을 비추기 때문에 오히려 한계에 맞닥뜨릴 수 있다. 여전히 백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현실의 한계가 그대로 나타나는 것처럼. 가상현실의 무한함이 현실의 한계를 더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듯하다.
‘관찰의 글쓰기’에서는 사진에 대한 언급이 많다. 사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만, 동시에 있는 힘껏 연출되었다는 특징 또한 가진다. 사진 작가의 의도를 담아 사물 또는 인물을 배치하고 꾸며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전쟁을 기록한 사진을 하나 언급한다. 남북 전쟁을 기록하고 드러내는 사진이지만, 시체의 위치와 모습, 주변 사물이 의도적으로 교정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꾸며졌기 때문에 더 사실 같은 사실을 전달할 수 있다는 역설이 존재한다.
지금껏 읽어본 글 중에 세상의 역설을 이렇게 통렬하게 고찰한 글이 있었나. 저자가 밝혀내는 역설은 세상을 구성한 고유의 법칙을 드러낸다. ‘새옹지마’라는 사자성어는 좌절이 곧 좌절이 아닐 수 있고, 희망이 곧 희망이 아닐 수 있음을 시사한다. 세상만사는 모두 두 개의 얼굴이 있고, 저자의 글은 우리가 보통 한 쪽 면만 바라보고 사는 데 익숙해졌음을 지적하는 듯하다.
정희진 작가의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 쓴다>에서 충격적으로 다가온 문구가 있다. 지나가듯이 가볍게 무언가를 인용하면서 “무례와 곡해와 요약의 폭력성을 무릅쓰고” 내용을 옮겨보겠다는 문장이었다. (나도 역시나 무례와 곡해와 요약의 폭력성을 무릅쓰고 해석을 시도해보자면) 허락 받지 않고 마음대로 옮겨보겠다는 무례와, 그 과정에서 혹시나 발생할 수 있는 곡해와, 또 임의로 내용을 선택하여 정리했다는 일방적인 요약이 폭력적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언어의 한계를 통감해야만 가능한 문장이었다.
이 책에는 언어의 한계와, 따라서 글을 쓰는 사람이 마주칠 수밖에 없는 고뇌를 담고 있다. “언어의 실패와 그 필연적인 왜곡”을 인지한 작가 ‘제임스 에이지’는 끊임없는 자기 검열과 자기 비판을 반복한다. 그 과정이 얼마나 시니컬한지 가끔은 자기 혐오까지도 뻗어가는 듯했다. 그는 자신이 전하는 글에는 “불가피한 오염”이 있으며, 은유는 언제나 불충분하다고 여겼다. 심지어 저널리즘을 표방하는 언론사까지 비난하며, 글을 쓸 수 있는 자격을 질문한다.
저자는 사진작가 ‘애니 아펠’을 통해 재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의 과정을 풀어낸다. 애니 아펠을 오랜 세월에 걸쳐 한 가족과 친밀한 시간을 쌓아올림으로써 이들의 일상을 변형 없이 재현하려고 했다. 그 어떤 의도된 연출 없이 불완전하고 혼란스러운 일상의 모습을 그대로 찍어냈고, “삶의 복잡성을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니는 “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요”라고 말했다. 오랜 시간과 친말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대상을 완전하게 그려내기에는 불충분하다는 자기의심”은 타인을 재현하려는 사람들이 직면할 수밖에 없고, 직면해야 하는 문제였다. “사람들을 재현하는 것은 언제나 그들을 축소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2장에서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를 짚어준다. “연필이 지닌 위협”을 알려주고, 이 일의 한계와 폭력성을 고발한다. 글을 쓰면 쓸수록 묵직한 책임감을 통감한다. 그러나 이러한 무거운 마음과 자기 검열의 고통이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리라 믿는다. 자기만족에만 집중하는 순간 오만이 되고, 오만은 만용이 될 것이다.
저자는 ‘심 라이프’에서 가상 현실이 “결코 당신의 상상력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언급한다. 이상적인 모습으로 철저히 꾸며진 세상 속에는 “현실에 질감을 부여하는 불화와 균열을 완전히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실수, 고통, 불완전하고 엉망진창인 부분들이 오히려 현실에 다채로움을 부여하는 요소라고 말한다. 오늘도 나는 내게서 비난하고 싶은 특징을 찾아냈는데, 이 특징이야말로 나를 다채롭게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이 아닌가.
특히 3장 ‘거주의 글쓰기’에 수록된 글에서 불완전한 삶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많이 느꼈다. 상상 속의 완벽한 로망이 실현된 삶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에 환호하는 것이다. 저자에게 로맨스는 “서로의 선별된 버전과 교감하기보다는 흩어지고 압도되고 분투하는 우리의 완전한 자아를 소환하는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가까웠다.” 즉, 꾸며진 모습이 아니라, 일상의 전투를 함께하는 것.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으로 유명한 문장이 떠오른다. “모든 행복한 가족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족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윤새라 역).” 즉 우리는 서로 다른, 크고 작은 불행들을 이끌어 안고 살아가는데, 저자는 각자 마주한 균열과 불완전을 옹호하는 것이다. 이것은 큰 위로였다. 다들 매일매일 몸 안팎으로 아주 분주하고 전쟁과도 같은 일상을 치러내지 않나. 그것야말로 사랑이고, 일상이고, 삶이라는 명제는 공감을 넘어선 위로였다.
저자는 가상현실처럼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특징이 삶의 가치임을 언급한다. 내 삶에 나의 부재가 허락되지 않게 떄문에, 모든 걸 직면해야 하기 때문에 현실이 그 자체로 가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일까.
중요한 조언이 가득한 책이었다. 이면의 세상을 함께 바라보는 다각도의 관점과, 글 쓰는 사람에게 건네는 날카로운 충고와, 일상을 더 사랑스럽게 바라보아도 될 것 같은 위로가 있었다. 읽기 쉽지 않은 편이었지만, 한 문장을 천천히 읽어낼수록 깨달음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나의 사유와 쓰기가 이전보다 조금은 더 깊어졌음을 느낀다. 이제 더 신중하게 글을 쓰려 노력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