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희량 Dec 09. 2023

또미니즘

지난 평습을 애인에게 보여주자마자 알았다. 그는 내가 너무 '젠더' 중심적으로 생각한다고 여길 것 같았다. 넌지시 물어보니 맞았다. 사실 애인에게 보여주는 순간 알아차린 것도 아니다. 나는 '여성성'이라는 단어를 쓰는 동시에 예감했다. 누군가는 내 글이 젠더에 매몰됐고 그래서 오히려 젠더 구분을 드러낸다고 생각할 거라고. 그래서 처음엔 "최근 여성성에 대한 연구를 하느라 나도 지긋지긋하지만"과 같은 추임새를 덧붙였었다가 업로드 직전에 삭제했다. 페미니즘 이야기를 할 때마다 겪는 자기검열과 지나친 해석이 될까 조심스러워 하는 내 태도가 싫었다.


막상 애인이 '내가 너무 젠더 쪽으로 치중되었냐'는 질문에 긍정하자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분노가 향하는 곳은 젠더 이야기만 하면 예민 또는 편협하게 볼 누군가였지만, 애인은 내 옆에 있었다는 이유로 분노를 받아야 했다. 나와 젠더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하는 (유일한) 남성인 애인은 나를 이해하면서도 남성의 정체성을 잘 학습한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문제로 숱하게 부딪혀왔으나, 여전히 부딪히고 있고, 앞으로도 부딪힐 걸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싸움은 보통의 여성과 보통의 남성이 싸우는 모습과 닮아 있다. 일단 내게는 한국 여성이 흔히 갖는 응축된 분노가 있다. 이곳은 성범죄가 많고 “페미”가 비하가 된 나라이므로. 그리고 애인은 남성을 적대시하는 경향이 심해진 한국의 주류 페미니즘에 대한 불편감이 있다. 내 애인이 젠더에 대한 대화가 가능한 흔치 않은 남성이란 점이 늘 자랑스러웠지만, 우리의 싸움이 드러내는 사실은 하나다. 우리는 서로를 반만 이해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애인과 젠더 문제를 말하기 위해서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피로한 일이다. 단어를 고르고, 어감을 검토하고, 감정을 없애 건조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해야 하니까. 가끔은 그만두고 싶다. 날것의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내놓아버리고 싶다. 꼭 애인 앞이 아니더라도 페미니즘은 피곤하다. 완벽한 페미니스트인 가상의 여성과, 완벽히 반페미니스트인 가상의 남성 사이에서 검열하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어엿한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한 윤리적/행동적/사상적 조건은 엄격하고, 급진성은 사회가(남성이) 예민하게 경계하는 성격이다. 페미니즘은 극단만 비추는 스펙트럼의 가운데에서 양쪽의 압박을 지속적으로 받는 일이다.


조심스럽게 대화하려는 시도가 피로하게 느껴지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급진성을 버리는 것이 패배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이미 인내하는 것들이 많으므로, 더 인내하고 맞춰가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자존심 상하기도 한다. 언제나 대화의 실패를 예견함에도 불구하고 이어가야 하는 비참함이랄까. 그렇지만 분노를 표현한다고 통쾌한 결론을 맞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논문은 우리나라 페미니즘의 급진성이 남성과 긍정적인 관계를 쌓아가며 살아가는 삶을 모두 부정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여성과 남성이 모두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은 거부할 수 없다. 한국 여성으로서 한국 남성에게 갖는 분노와 경계심이 체화되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나와 좋은 우정을 나누는 남성도 있다. 이 양극의 감정이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구체적인 얼굴을 아는 남성은 미워하지 않으면서, 익명의 남성은 미워한다는 역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가? 도무지 알 수 없다.


이미 예민한 화두가 되어버린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같이 살아가야 한다면, 피로를 안고 조심스럽게 지속적으로 대화를 이어가야 할 뿐. 일단 어제, 나는 애인과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겨우 받아들였다. 여기부터 다시 시작하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