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낭독으로 책을 읽었다. 글을 직접 지은 사람의 목소리를 따라 글을 읽어본 경험은 처음이었다.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속도와 억양과 강세를 들을 수 있어서 생경하면서도, 내가 순간적으로 상상한 속도와 억양과 강세와는 달라 당황하기도 했다. 안담 작가도 언급한 부분이었다. 낭독이란 여러 가지의 상상은 제한하는 동시에 한 가지의 방식을 선명하게 전달하는, 위험한 일이라고. 동시에 그는 자문했다. 그렇다고 금기시해야 하는 일인가? 어쩌면 낭독은 작가가 ‘음란하고 불온하다’는 형용사를 붙인 이 작품과 가장 어울리는 감상법이 아니었을까.
이 작품은 짧으나 강렬했다. 음란하고 불온한 것만큼 타오르는 단어가 있나? 그리고 음란함과 불온함을 이리도 구체적으로 보여준 장면들이 있나? 이 작품에는 초등학생의 눈으로 바라본 성과 젠더, 섹슈얼리티가 등장한다. 초등학생은 성의 향유와 표현이 미숙한 동시에 금지된 존재임에도, 이들은 은밀하게 탐색하고 고민하고 실험한다. 그 호기심이란 얼마나 음란하고 불온한가.
이 작품 특유의 도발적인 인상은 화자의 신분과 서술의 괴리에서 온다. 초등학생이라는 지위임에도 상황을 날카롭게 읽어내고 분석하는 독백이라니. 그 대조적인 모습에 책을 펼치자마자 속수무책으로 빨려들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아이가 말하면서도 어른이 회고하는 듯한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그렇다면 상당히 자전적이란 작가의 말은 새삼스럽지 않다. 이 작품은 어느 누구에게나 그럴 것이다. 교실이라는 공간이 가진 필연적인 향수, 그리고 무심코 지나온 어린 시절에 대한 불가피한 무지 때문이다. ‘직접 왁스를 먹였다는 마룻바닥’이라든가, ‘오후의 햇빛이 창을 통과하며 깊숙이 들어온 교실’이라든가, 그네라든가… 이런 서술이 빛 바랜 기억을 더듬게 한다. 그리고 ‘나’의 경험과 생각들은 내가 소녀로서 지나오며 느꼈으나 의식하지 못했던 시간을 다시 쳐다보게 했다. 나는 어떻게 자랐지?
순수한 백지가 물들어가는 과정을 길게 잡아당겨 늘어뜨려 놓고 천천히 들여다보는 듯했다. 사회에 편입되기 전, 아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어가는가. 어떻게 성 구분을 수용 또는 거부하고, 그에 얽힌 권력 관계를 이해하며, 동시에 물음을 갖는가. 어쩌면 그곳에 우리가 잊어버린 중요한 질문들이 있을 것이다. 이제는 당연하게 여기기에 묻지 못하는 질문들이.
이 아이는 어떤 중학생이 되었을까?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서 다시, 어떤 음란하고 불온한 행위들로 세상을 배워갈까. 결국 그가 성인이 된 모습이 나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짐작은 오만일까 체념일까. 분명한 건 씁쓸함은 확실히 자리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