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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량 Jan 15. 2024

장 지글러, 인간 섬

왜 ‘문제’라는 단어는 약자에게 붙을까? 난민 문제, 노인 문제, 장애인 문제… 마치 이들의 존재가 문제라는 뉘앙스지 않은가? 물론 우리는 글자 사이의 맥락을 읽는다. 난민(이 고통을 겪는) 문제라고. 그러나 자꾸만 ‘난민 문제’, ‘노인 문제’를 입에 담아보니 사회의 골칫거리를 바라보는 표현 같다. 이 단어의 발화자는 주로 문제 바깥에 위치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난민이 아닌 사람들.


이 책은 난민 문제 바깥에 위치한 사람/기관/사회가 난민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는지 보여준다. 그래서 얼마나 진심이 아닌지, 어떻게 배제하기 위해 애를 쓰는지 폭로한다. 번듯한 이름과 정책 아래엔 차별과 폭력이 있었다. 여러 명의 난민이 뗏목 하나로 지중해를 건너온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았지만, 이들이 유럽 남쪽 국경 수용소에 배치되고 그곳에서 비인간적인 생활한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들이 자국에서는 교사와 변호사 등 사회적 지위가 높은, 교양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한 국가에서 어엿한 삶을 일궜던 사람들이 모든 입지를 포기하고 도망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뜻이다.난민에 대한 고정관념이 뒤집어지는 순간이었다. 자국에서 빈곤했기에 도망쳤을 거라고 지레짐작한 것일까? 풍족했던 과거와 비참한 현실의 괴리는 결국 개인과 국가 사이의 우연적인 관계를 비춘다. 태어난 나라가 선진국일 수도 있고, 분쟁 국가일 수도 있는 우연이 삶을 결정한다. 개인의 능력으로는 증명할 수도, 달성할 수도 없는 평화가 있다. 우리는 특별한 존재라 를 누릴 수 있는 것인가? 그저 우연일 뿐이다. 우연임을 실감하지 못하는 오만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소외와 배제의 문제가. 그리스 난민촌의 문제는 ‘난민 문제’ 바깥의 사람들이 우연히 얻은 환경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다.


유럽연합의 중요한 과제는 득실을 계산하는 것이다. 소위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자본주의적 임무다. 그들은 난민을 경제적 위협으로 인식했고, 결국 유입을 차단했다.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란 얼마나 보기 좋은 명목인가. 이 책은 난민 문제에 대응하는 유럽연합의 교묘한 수법을 지적한다. 표면과 이면의 영악한 차이를 신랄하게 폭로한다. 저자는 유엔식량계획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식량 조달이 필요한 지역을 선하는 과정을 두고 "비참함을 서열화"한다고 표현한다. 그의 시각을 통해 바라보니 국제기구는 그보다 소극적일 수가 없었다. '난민 문제'는 난민을 구제하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기 때문에 지속된다.


우리나라로 눈을 돌려볼까. 우리는 늘 머릿수의 문제를 논하고 있다. 줄어드는 학생의 수, 노동자의 수, 지방 인구의 수를 셈하며 미래를 걱정한다. 사람이 희소해지고, 국가가 소멸할 거라며 극단적으로 비관한다. 유럽 어딘가엔 사람들을 수용하지 못해 방치하는데, 우리는 사람이 부족하다고 한탄하고 있다니. 그곳과 우리나라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난민과 자국민은 무엇이 다른가. 난민은 배제하고 자국민은 지원하는 것이 당연한 이유는 무엇인가. 나고 자란 배경이 달라 상식과 관념이 다르단 점? 그렇다면 자국민은 모두 수용 가능한 범주로 행동하는가? 국가의 경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보통 걱정을 표출한다. ‘외부인'의 수용이 빚을 많은 갈등을 우려한다. 부인하진 않겠다. 언어, 문화, 종교… 서로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은 많다. 하지만 선을 긋는 것이 최선인가? 왜 새로운 인구를 '잘' 수용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할 생각은 하지 않는가? 외부인을 수용했을 때 문제가 생긴다면 외부인의 탓이 아니라 외부인을 사회에 편입시키기 위한 제도가 부족한 탓이다. 서울 바깥으로 나가니 이미 다문화 가정, 외국인 노동자가 넘쳐 났다. 이미 한국인의 범주는 모호해질 대로 모호해졌다. 


‘난민 문제’는 유독 우리나라에서 거리감이 느껴지는 단어다. 그건 지리적으로 멀다는 이유뿐일까? 이미 외국인이 수없이 많음에도 한국인의 범주를 협소하게 상상하는 우리의 폐쇄적인 상상력 때문은 아닐까? 인구의 부족을 걱정하되, 포용의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이 과연 효율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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