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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밋너 Jun 08. 2023

드럼이 진짜 엄청난 건요,

#4. 악기가 없어도 드럼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열심히 브런치를 쓰다가 꽤 한동안 업데이트를 하지 못했다. 불가피하게 성사된 두 번의 해외여행이 있었고 그밖에도 놀러 다니느라 자주 집을 비웠으며, 일도 좀 해야 했고, 외주도 있었고, 그냥 심적인 여유도 없었던 데다가 벌려놓은 일 수습하기도 바빴기 때문에 브런치 창을 켜서 뭐 하나 적는 것도 심적으로 부담스러운 나날이 계속됐다. 그렇다, 핑계다. 그냥 바쁜 척하고 싶었던 거다. 쓰고자 하면 얼마든지 쓸 수 있었겠지. 치고자 하면 드럼이 없어도 얼마든지 드럼 연주를 할 수 있는 드럼처럼.


제목은 내가 좋아하는 연극, <온 더 비트>의 주인공 아드리앙이 하는 대사다. 아드리앙은 온통 새카만 암흑 속에서 자신의 허벅지를 때리고 박수를 치며 발을 구르는 행위만으로 리듬을 만들고 비트를 쪼개며 속삭인다. "드럼이 진짜 엄청난 건요, 악기가 없어도 드럼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물론 극을 다 보고 나면 이 대사에 담긴 뜻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고 얼얼해지거나 혹은 엉엉 울고 싶어지거나 하지만. 어쨌든 4월 말부터 6월 초까지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리느라 드럼과 조금 멀어질 때마다 나는 아드리앙의 저 대사를 떠올렸다. 그래, 드럼이 진짜 멋진 건...


그런데 난 아드리앙이 아니었다.


혼자 허벅지를 때리며 드럼 연습을 하려고 해도 손발이 자꾸 꼬이고, 드럼을 칠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에 허둥지둥했다. 킥 대신 헛발질을 하고 머릿속에선 스네어라고 생각하고 무릎을 치면서 정작 라인은 하이탐을 따라가고 있는 엉망진창 노 드럼 연주의 연속. 삿포로발 인천행 비행기 안에서 에어팟을 끼고 발을 까딱거리면서 열심히 에어 드럼을 쳐봤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귓가로 흘러드는 내 연습곡들의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나는 1만 미터 상공 위에서 조금 슬퍼졌다.



<온 더 비트>는 나를 드럼으로 이끈 연극이다. 1월 1일, 새해와 함께 종연했던 그 공연이 5월 17일, 앵콜 첫공과 함께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Fall Out Boy의 The Last of the Real Ones를 치면서 느낀 내 실력의 부족함과 드럼을 향한 미묘한 조바심을 끌어안은 채 강기둥과 윤나무의 첫공을 연달아 봤다. 거의 1, 2주간 드럼을 치지 못한 상태에서 앵콜 첫공 아드리앙이었던 강기둥이 드럼 스틱을 두드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초견을 더럽게 못하는 나는 악보를 따라가기 바빠서, 연습을 할 때나 연주 영상을 찍을 때 계속 악보에 매달리고 만다. 악보를 드럼 위로 옮겨와 리듬을 따라 순수하게 느끼고 즐기며 치는 게 아니라, 정답을 내기 위한 공식을 달달달 외워서 틀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학생처럼 드럼을 친다는 사실을 <온 더 비트>를 보면서 또 한 번 깨달았다. 조금 틀리더라도, 멋쩍게 혀 한 번 쑥 내밀고 다시 리듬 위에 올라타서 즐길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할 텐데. 누가 나한테 돈 주면서 드럼 치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내가 재미있고 싶어서 치는 건데. 안 그래?


브루노 마스 내한 기념으로 세상 신나는 Uptown Funk를 연습곡으로 골라놓고도 어깨 한 번 들썩거리지 않고 차분하게 치고 있는 영상 속 나를 보고 나니 스스로를 향한 부끄러움이 노도처럼 밀려들었다. 재밌게 치자. 드럼이랑 오래오래 친하게 지낼 수 있도록, 틀리지 않기 위해 치는 게 아니라 신나고 즐겁게 음악이랑 뒹굴며 놀기 위해 치자. 그런 다짐을 하며 첫공이 끝나자마자 연습실로 달려가 단 30분 동안 신나게 드럼을 두들기고 뛰쳐나왔다. 아직 완전히 내려놓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조금 더 신나고 즐겁게 드럼을 치게 될 거라 믿으면서.


다음 주에는 다섯 번째 연습곡이었던 윤도현 밴드의 나는 나비를 촬영하고, 여섯 번째 연습곡을 시작할 거다. 여섯 번째 연습곡은 크라잉넛의 말 달리자다. 우하하! 미친 듯이 달리면서 쳐줄테니까, 잘 지켜보라고, 아드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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