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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스 Oct 03. 2022

[초단편소설] 황금시대

영화 <황금시대: The Golden Era> 를 보고 


황금시대 



 늦가을 새벽이었다. 눈 앞으로 보이는 것은 죄다 푸르죽죽한 색을 띄었다. 그녀는 짝다리를 짚은 채, 허술한 목재 난간에 기대어 몸을 반쯤 허공에 내놓고 있었다. 바람이 나무를 스칠 때마다 강물이 은은한 빛을 내며 찰랑거렸다. 나는 안주머니를 뒤져 몇 개비 없는 성냥갑을 꺼내며 슬쩍 그녀의 웃옷을 쳐다보았다. 깃털이 덕지덕지 붙은 모직 재킷은 헤져있었고 왼쪽 주머니를 두어번 깁은 흔적이 보였다. 

 양손잡이라고 했었다. 수저를 들 때, 걸레질을 할 때, 차를 우릴 때는 오른손. 글을 쓸 때만 왼손을 썼다. 나는 그녀의 마른 손가락들이 거칠한 종이 위를 누비는 모양새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부엌에서는 찻물이 끓어오르고, 반쯤 열어둔 창문 틈새를 비집고 바람 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면 아주 삭아 좀벌레가 기어다니는 책상 위로 사각거리는 펜촉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좁은 방의 한켠에서, 해가 떠오르고 다시 질 때까지. 

 그녀는 무엇이든 새것을 싫어했다. 새것. 빳빳한 것. 빡빡한 것. 빠듯한 것. 기름칠을 하지 않아 쇠소리를 내는 철제 가구를 싫어했고 가슬한 새 모직의 느낌을 싫어했다. 십 이년 전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마지막으로 받은 선물인 녹그릇 안에는, 더 이상 쓸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던져둔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연필 수십자루가 담겨있었다. 

 얼마전부터 테이블 전등이 문닫은 선술집의 간판처럼 깜빡이더니 끝내 전구의 필라멘트가 나가버렸다. 그 후로 한동안 나는 펜끝이 종이에 닿아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내가 전구를 새것으로 갈아 끼워놓아도 마찬가지였다. 원고 대신 재떨이 위로 담뱃재만 눈처럼 쌓여갔다. 

 담배 꽁무니에 불을 붙였다. 그녀가 타오르는 성냥을 허공에 던졌다. 불꽃은 강물에 닿기도 전에 사라졌다. 한 숨을 길게 쉬며 그녀가 말했다. 사실, 난 담배 안피워요. 오랜 기억이다. 그 말이 맞는지 확실하지 않다. 사실, 난, 담배 안피워요. 내가 한 말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당시에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자켓 안주머니에 성냥을 넣고 다녔던 것일까. 내가 한 말이 아니라면, 그녀의 낡은 책상 위를 굴러다니던 무수히 많은 담뱃대들은? 

 그 여상한, 기억할 만한 것 하나 없는 새벽을 잊지 못하는 이유를 이제야 비로소 나는 알게되었다. 나는 그 날 그 새벽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기나긴 시간들 속에서. 골동품 가게 한 켠에서 영영 팔리지 않을, 볼 품 없는 풍경화같은 그 새벽―그 차디찬 공기를.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머리칼과 부어오른 눈두덩을. 무엇보다도 굳은살 박힌 그녀의 왼손 세 번째 손가락을,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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