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엄마의 날
25년은 넘은 친구가 두 명 있다.
그중 외국에 사는 한 친구가 1년에 2,3번 정도 한국에 들어오는데
그럼 그때가 우리가 정기적으로 만나는 날이다.
그날이 돌아왔다.
나와 함께 만들었던 생활로 아이 둘을 보는 게 나는 익숙하지만 (힘들긴 해도)
남편은 힘들 거라는 생각에 그동안 개인 약속은 안 잡았는데
지친 나에게 어른들의 수다와 자유로운 외식을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에
친구들과 약속을 잡았다.
보통 말하는 '자유부인'의 날이다.
그런데 나는 이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부인'은 원래 자유로운 존재인걸?
아이와 함께 다니면서 끊임없이 케어하지 않고 자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자유엄마'라는 단어가 맞는 게 아니냔 말이다.
여하튼 오늘은 나의 '자유엄마'의 날이다!
오랜 친구들 3명이 함께 보내는 '자유엄마'의 날이다.
서로에게 어떤 날인지 아는 우리는
가고 싶은 식당, 하고 싶은 것들을 착착 정했다.
누구 한 명이라도 여기 가보고 싶어 하면 식당을 예약하고
누구 한 명이라도 좋아했던 연예인이 나오는 공연이면 예약이다.
더 재미있는 게 있지 않을까? 더 맛있는 게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은 무의미하다.
이 시간을 이 친구들과 보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먹고 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식당 예약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
딸아이에게는 일주일 전부터 엄마가 약속을 가야 하는 것에 대해 알리고 설명해야
부정 - 거절 - 설득 - 협상의 과정을 거치는데 문제가 없다.
남편에게도 아이 둘을 맡기고 가는 입장에서 미리 3번 정도는 날짜와 시간을 꾸준히 공지해줘야 한다.
막내딸의 이유식과 간식도 두둑이 챙겨두고 아이의 하루 스케줄을 남편에게 알려준다.
남편이 아이들의 아빠인데 어련히 알아서 굶기지 않고 잘할 텐데
고작 7,8시간을 외출하면서 참 챙길 것도 많다.
나의 부재가 가족들에게 큰 불편함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떠는 수선이다.
그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건 어쩌면 가족이 아니라 나다.
나름 집에만 있던 애 엄마의 흔적을 지운다고 지우고 나서려는데
딸이 잠깐만 기다려보라면서 제일 좋아하는 손바닥만 한 과자 한 봉지를 가져온다
"엄마 나 이거 안 먹어도 되니까,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나눠먹어"
어느새 이렇게 커서 엄마 친구사이까지 챙겨주는 귀여운 딸이라니,
엄마 잘하고 있는 것 같으니 잘 놀고 올게
자주 만나지 못해 모임통장이 두둑한 어른 3명인 우리는
음식은 푸짐하게 4,5인분을 시키고
커피도 4잔에 케이크 2개까지 시켰다.
맛보고 싶은 건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단체 카톡방과 전화 통화를 수시로 하는 우리는 3시간을 내리 수다를 떨었다.
주제의 8할은 육아지만
성인끼리의 대화는 주제에 상관없이 즐겁고 진지하다.
어른의 문화생활도 놓칠 수 없으니까
뮤지컬도 보고
우리의 예전처럼 보고 나와서 이랬네 저랬네 이야기를 또 한참 하며 낄낄거렸다.
이제 헤어짐에도 익숙해진 우리는
다음 주에 또 만날 사람처럼 덤덤하게 몇 개월 후에 보자는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무려 몇 년 만에 하는 건지 모르겠는
이어폰을 끼고 버스 창 밖을 보며 멍 때리기를 하던 중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마음이 편해졌다.
예전엔 자유엄마를 한다고 하면 설렜고,
그날이 엄청 특별한 날이었다.
더 정확히는 특별한 날이어야 했다.
엄마가 아닌 오롯이 나로만 있는 시간이어서 아줌마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욕심이 과하지)
평소의 나와 의식적으로 분리되고 싶어 돌아오는 길에 '오늘은 육아 이야기만 너무 많이 했는데'라는 아쉬움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내가 무언가를 받아들인 듯한 느낌이다.
굉장히 특별한 날이라기보다 약간은 편한 몇 시간을 보내고 온 날이다.
'엄마'를 벗어던진 것이 아니라 '엄마'인 나의 하루에서 몇 시간 잠깐 친구를 만나고 왔다.
머릿속에 그득한 나의 최대 관심사인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배제하지 않았다.
그게 요즘 내가 살고 있는 이야기이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는 내가 살고 있는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이제야 엄마인 내가 익숙해진 건지,
내가 그런 나의 상황을 받아들인 건지는 모르겠으나
뭔가 마음이 편해졌다.
집에 돌아와 딸을 데리고 나와 그네를 밀어주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신나서 이야기했다.
- 엄마가 오늘 뮤지컬을 봤는데,
- (딸) 어떤 뮤지컬인데? 재미있었어?
- 엄마가 오늘 파스타를 먹고 스테이크를 먹었는데~
- (딸) 으힉?? 어제도 우리 파스타 먹었는데? 엄마 배 많이 나오겠다 ㅋㅋ
우리 이제 제법 티키타카가 된다.
25년이 넘어간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니
5년 조금 넘은 제일 친한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친구랑 또 잘 놀고 있다가 몇 개월 후에 또 어른 친구들 만나고 와야지
그땐 뭘 할까 벌써 핸드폰을 뒤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