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 전쯤 누군가 나에게 다른 사람에게 선물할 육아템을 물어보면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커피머신!'을 외쳤다.
첫째 때 6개월까지 근근이 하던 혼합수유를 마치고 14개월 만에 마신 커피의 짜릿함은 너무 강렬해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마 로미는 그날 엄마의 가장 높은 텐션을 보았을 거다.
지금 누군가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그때보다는 조금 더 생각하고 대답할 것이다.
"라디오 어때?"
육아를 하는데 필요한 아이템이 육아템이라면,
모빌, 분유포트처럼 필수템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주양육자의 건강한 심리상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보조 육아템도 중요하다.
나에게 라디오는 그 역할을 꽤나 톡톡히 해내는 보조 육아템 중 하나다.
아기가 뱃속에 있을 때 출근길에 들었던 클래식 채널은 마음의 안정을 주었다.
그때 들었던 곡의 설명이 하나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음악을 들으며 느꼈던 편안함과 안정감의 느낌은 남아있다.
출산 후 아기와 집에 둘이 있을 때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오전 라디오 루틴을 만들었다.
일어나면 클래식 채널을 들으며 아침 준비를 한다.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나 처음 듣는 소리기 평화로운 음악이길 바라며 볼륨을 조절한다.
9시가 넘어가면 특유의 차분하지만 밝은 분위기의 아침방송을 틀어놓고 집안일을 시작한다.
정신없이 소란스럽지 않지만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하는 느낌이다.
그 사이 아기는 낮잠을 자고 어느 정도 집안일과 음식 만들기를 끝내놓은 11시 즈음
간식과 함께 잠깐의 휴식 시간으로 라디오를 듣는다.
12시 프로그램부터는 텐션이 너무 올라가 가볍게 듣는 나에게는 조금 버거울 때가 있으니까 그만.
이미 오전에 채운 감성으로 충분하다.
어린 아기를 육아할 때 힘든 것 중 하나가 소통에서 오는 에너지의 결핍이다.
물론 보통의 경우 남편이 저녁에 오긴 하지만
둘의 대화는 대부분 육아에 대한 이야기 거나 아이에 대한 이야기 거나 급한 일 처리에 대한 이야기지 않을까
주 양육자는 아침부터 내내 대화를 할 상대가 없다.
다른 사람과 통화라도 하면 조금 괜찮은데 평일 낮에 통화가 가능한 친구가 얼마나 되겠는가
예전에 오랜만에 전 회사 동료와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내가 참 신이 났는지, 그 동료가 그러더라
“언니.. 요즘 집에만 있어?"
육아를 하는 사람은 성인과의 대화가 그립다.
그럴 때 라디오가 도움이 된다.
물론 내가 하는 말을 라디오 건너의 사람들은 들을 수 없지만
주로 육아가 아닌 ‘어른’ 사람들의 보통 사는 이야기도 들려주고
음악도 그 날씨의 무드에 맞게 선곡해서 들려준다.
목소리와 톤이 좋은 DJ가 툭 던지듯 내민 멘트에 어느 때엔 괜히 감정이입하며 은근한 위로를 받기도 한다.
조금은 자주 대답도 한다.
아이와 함께 있을 때 티브이는 볼 수 없지만
라디오는 아이를 돌보면서도
바쁜 다른 집안일을 하면서도 충분히 들을 수 있다.
사실 어떤 콘텐츠를 접하거나 재미를 느끼고 싶다기보다 1초도 안 걸리는 시간으로 라디오를 틀어두는 것 만으로 마치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처럼
집안의 공기가 북적인다.
요즘엔 오전 11시에 이문세 아저씨 라디오가 참 포근하게 달달하다.
아이스커피 한잔에 초콜릿 과자 하나 먹으면서 들으면
괜히 문화생활하고 나왔을 때의 말랑한 마음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 외로운 육아를 하고 있다면
하루 이틀만이라도 라디오를 들어봤으면 좋겠다.
마음에 여유가 생길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