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화가들(2)
지난여름 보통리 저수지에는 연꽃이 고상하고 우아한 자태로 사람을 홀리고 있었다. 여름날 수채화 같았던 그곳의 안부가 궁금하여 해 질 무렵 겨울 찬바람 부는 저수지를 찾았다.
갈대 덤불숲에서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말고 저수지에 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살가죽만 남은 연잎과 빈 연밥 주머니가 허리가 부러져 차가운 물속에 얼굴을 묻고 쓰러져가고 있었다. 겨울에 내몰린 연의 모습은 화려했던 지난날이 전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만큼 초라하고 쓸쓸했다.
저수지를 둘러싸고 낸 길을 걸었다. 가로수에는 늦가을까지 새 옷을 입혀 나뭇잎을 털어내고 아직 남은 잎들이 가지 끝에 매달려 부르르 떨었다. 멀리 정오의 해가 엉금엉금 산 중턱으로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고추밭을 태운 잔불 주변을 똥개 두 마리가 흙먼지를 날리며 꼬리잡기를 했다. 녀석들은 해가 등 뒤에 와 있는데도 시컴댕이 아이들처럼 아직 귀가하지 않고 있었다.
해가 산 중턱으로 내려오며 몸을 태우기 시작했다. 해의 불꽃 파편들이 지평선을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그 파편들은 무채색 저수지를 황금색으로 칠했다.
황량한 저수지의 창백한 연잎과 빈 연밥 주머니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게다가 물속에 또 하나의 자기를 복제하여 데칼코마니를 연출했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만들어낸 갖가지 도형과 상형문자는 눈과 마음을 호강시켰다.
가던 길을 멈추고 난간에 팔을 기대 서서 숨은 그림 찾기를 했다. 심지를 태워 초가집 어두운 방을 밝히던 호롱과 등잔대를 찾았다. 그리고 손가락만 넣으면 낄 수 있는 보석 반지가 곳곳에 있었다. 갈대 덤불숲에서 얼굴 없이 꼼지락거리던 범인은 청둥오리였다. 녀석들은 덤불숲에서 나와 일렬종대로 황금 물살을 가르며 저수지 한 복판으로 헤엄쳐 나왔다.
산 중턱에 한 잎 베여 물린 해가 점점 먹혀들어가 자취를 감췄다. 이제 저수지는 먹을 갈고 붓을 찍어 그린 수묵화로 변했다. 이제 어느 누구도 저수지에 그려진 검은 도형과 상형문자의 정체가 연꽃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연꽃의 흑백으로의 변신은 잡념을 사라지게 하고 마음을 차분하게 했다.
고요한 수묵화 풍경 속으로 들어와 정적을 깨는 녀석이 있었다. 청둥오리 한 마리가 먹물을 흠뻑 뒤집어쓰고 연꽃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먹이를 찾아 물속에 얼굴을 집어넣고 엉덩이를 들어 싱크로나이즈를 연기했다. 녀석 때문에 그림은 살아 움직였다.
수묵화는 오늘 해가 가는 길에 그리는 마지막 그림이었다.
겨울 보통리 저수지에는 날마다 지평선을 오가며 온몸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있다. 하늘에 머무는 동안 저수지를 채색하고 디자인한다. 매일 시시각각 그리는 셀 수 없는 수많은 그의 그림에는 같은 그림이 하나도 없다. 화가의 캔버스에 들어오면 모두가 개성 있는 특별한 존재가 된다.
오늘 화가는 연꽃의 황혼으로 가는 길에 황금 융단을 깔고 아름다운 의상을 마련해주었다. 누구든지 보통리 저수지를 찾아가면 입장료를 지불하지 않고 위대한 화가의 작품을 무한정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덤으로 유년시절의 추억을 선물로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