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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Dec 01. 2022

연말의 우울과 행복

캘리포니아의 반년에 가까운 긴 여름이 지나고 11월 중순부터 날씨가 부쩍 서늘해지면, 기분이 들뜬다. 코를 킁킁대며 찬 기욱을 훅 들이 마시면, '아, 살 것 같다'하는 탄식이 나오고야 만다. 그러고선 내가 언제부터 겨울을 이토록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지, 하며 새삼 세월의 변화를 체감한다. 그토록 여름을 좋아했건만. 캘리포니아의 사막 기후 앞에서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사람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라는 걸 나는 나 자신을 통해 깨닫고 있는 중이다. 


걸쳐 입는 옷이 두꺼워지면 겨울이 왔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11월이면 유튜브 알고리즘 추천에 뜨는 캐롤모음집도 듣기 시작한다. 캐롤 음악은 매년 들어도 설렌다. 산타할아버지에게 받고 싶은 선물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아이들 덕에 한 달 일찍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문한다. 아이들이 받고 싶은 선물은 한국에서만 살 수 있는 변신 로보트이기 때문에 미리미리 주문해서 해외배송을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이들 겨울 방학에 맞춰 상반기부터 예약해 둔 여행지 정보를 얻기 위해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켠다. 이번 겨울의 여행지는 플로리다. 생전 처음 가보는 플로리다가 어떤 곳인지 블로그를 뒤적이며, 소소한 행복감에 젖는다. 플로리다는 겨울에도 따뜻한 날씨여서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겨울철 여행지 중 탑으로 꼽히는 곳이다. 시간과 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한 두달씩 머무는 곳이라고 하니, 과연 어떤 곳일지 기대가 된다. 


크리스마스에 가족들과 함께 맞춰입을 파자마와 빨간 스웨터를 온라인 주문하고, 여행을 앞두고 또 챙겨야 할 건 뭐가있나 생각해본다. 조만간 아울렛에 가서 가족, 친구들의 크리스마스 선물도 사야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선물은 뭐니뭐니 해도 받는 것 보다 주는 행복이 더 큰 것 같다. 




그런데 말이다. 


연말을 앞두고 가족, 지인들의 선물을 고르고, 친구들과 연말 모임 약속을 잡고, 연휴에 여행할 곳을 예약하는 가운데 행복했던 마음이 갑자기 바닥으로 뚝 떨어져 우울해질 때가 있다. 


우울이라니. 그 감정에 스스로도 당황한다. 설레는 와중에 갑자기 터져버린 우울감은 끈질기게 일상에 따라붙는다. 우울하다. 뭐지, 이 우울함의 근원은. 


연말의 우울감은 낯선 감정은 아니다. 매년 이쯤이 되면 난 쉽사리 우울감에 빠지곤 했다. 한 해 내내 울면 안되는 '캔디'같은 마음을 지닌 채 힘차고, 굳세게 살아왔건만 11월, 12월만 다가오면 매년 찾아오는 연말 손님처럼 우울감이 날 찾아온다.


이렇듯 타지생활을 하며 마음이 바짝 말라 가뭄이 올 때는 대개 연말 언저리다. 10월부터 거리 곳곳에서는 축제 분위기가 한창이다. 할로윈, 땡스기빙데이(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신년으로 이어지는 이 기간에는 그 어느때보다도 내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체감한다. 난 한국으로부터 9,648km나 떨어져 있는 이곳 LA에 부모도 형제도 없이 남편과 두 아들 딱 네 식구만이 단촐하게 삶을 꾸리고 있다는 걸 마주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연말 시즌이면 한국에서도 그렇듯 미국 사람들은 가족들과 유난히 많은 시간을 보낸다. 부모님, 시부모님도 안 계신 이곳에서 우리 가족은 철저히 고립된 섬처럼 여겨진다. 


부모님이 한국에 있기에 미국에서는 우리 네식구끼리만 보낼 수 있는 넘치는 자유시간이 있지만, 그 자유가 때때론 너무 막막하게 다가온다. 특히 이런 연말에는 말이다. 스스로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나면, 깊은 상념도 겉잡을 수 없이 따라온다. 


내 인생이 어디로 흐르고 있는가, 덜컥 두려워진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원하지 않는 길로 접어들어 영영 본래의 길로 되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한다. 인생은 변수로 이뤄져 있으므로, 인생 계획이라는 게 불필요하다는 걸 깨달은지 오래지만 이 기간에는 계획처럼 흘러가지 않는 삶에 서글픈 마음이 든다. 그리고 한 해의 끝무렵에 올해 이루고 싶었지만,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떠올리며 착찹한 기분을 느낀다. 




이렇게,

한바탕 우울감의 파도에서 헤엄치고 나면, 며칠 또는 몇 주 내로 마음이 평온한 상태로 되돌아온다. 


 




연말에 우울과 행복이 동시에 느껴지는 거, 나만 그래?


친구는 자신 또한 그렇다고 대답했다. 한 해가 끝날 무렵에는 우울과 행복이 동시에 느껴진다고 했다. 아무렴 한 해를 마무리하고, 나이 한 살을 더 먹는 상황에서 누구나 우울과 행복이 같이 올테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죽음과 가까워지는 일이고, 그 사실은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상실할 시간도 한 발자국 더 가까워졌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20대까지만 해도 '죽음'에 대해 별다른 생각없이 살았는데, 30대에 진입한 후로는 조금씩 죽음과 삶에 대해 더 자주 곱씹어보게 된다. 지인들로부터 들려오는 부고 소식이 하나 둘씩 늘어나는 데다가 부모님의 나이듦을 한 해가 다르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도 연말에는 우울감 보다는 행복한 마음이 더 크다.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집에 꾸며진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며 설레고, 차 안에서 울려 퍼지는 캐롤을 매일 같이 들으며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다. 얼마 남지 않은 2022년 한 해 동안에는 조급함과 불안함을 저 멀리 내려놓고, 여유와 행복감만 느끼고 싶다. 적어도 노력한다면, 오늘 하루 미세하게나마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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