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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Aug 09. 2021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풍경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

타지에 사는 가장 큰 단점을 꼽으라면 가족과 떨어져 지낸다는 사실이다.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한 번이라도 살아본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봤을 지 모른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낯선 곳에서 외로이 살아가는가’에 대하여.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지내는 일은 한 사람의 마음 속에 구멍을 남기고, 헛헛한 감정을 시시때때로 불러 일으킨다. (물론 가족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예외다) 특히나 육아를 하고 있는 여성이라면 친정에 대한 그리움은 극에 달할 수 밖에 없다. 아이를 낳고 나면 친정 부모님의 보살핌이 어찌나 간절해지는지. ‘육아는 친정빨’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하루 종일 빈 틈 없이 육아에 시달린 주말 밤이면 '한국에 살았더라면 주말이 조금은 더 여유롭고 행복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한국에서는 양가 부모님과 함께 공동육아를 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한국 가족들의 부재는 나뿐만 아니라
한창 자라나고 있는 두 아이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최근 한국에 계신 부모님이 미국에 방문하면서 문득 위와 같은 의문이 들었다. 미국 삶에서 부모님의 부재는 나에게도 큰 결핍이지만, 어쩌면 자라나는 두 아이에게도 조부모의 부재가 크게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런 생각이 든 건 TV 만화를 보지 않고도 하루 종일 할아버지 할머니와 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두 아이를 지켜본 후였다.


아빠는 미국에 도착한 첫 날부터 첫째 아들의 '잠 재우기' 당번을 자처했다. 첫째는 할아버지와 침대 위에 누워 할아버지가 읽어주는 동화책과 위인전을 듣다가 금세 꿈나라에 빠져 들었다. 평소 내가 책을 읽어줄 때만 해도 아들을 재우는 데는 20~30분 이상이 걸렸는데, 할아버지는 10분컷이었다. 아무래도 할아버지의 목소리톤과 느린 말의 속도가 더해져 아들의 눈꺼풀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무거웠던 게 아닐까 싶다. 


아이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 더이상 나를 찾지 않고 곧바로 할아버니 할머니가 머무는 손님 방으로 직행했다. 아침에 눈을 떠서 거실로 나오면 정원에서 아이들과 엄마 아빠가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할머니가 주는 과일 간식을 아기새처럼 야금야금 받아 먹으며 노래를 부르고 노는 아이들의 얼굴에 덩달아 나까지 미소가 지어졌다.


할머니에게 배운 마징가Z, 독수리 오형제 주제가를 부르는 두 아들의 모습에 푸하핫, 웃음이 났다. 요즘 아이들 중에, 것도 미국에 사는 아이들 중에 그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아이는 너희 뿐일거야.




그러고 보니 과거의 나와 남동생 또한 외갓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외할머니가 녹화해둔 토요 미스테리 극장을 시청하며 할머니표 신라면을 먹었던 일. 그 때 먹었던 라면 맛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요즘도 그 맛을 느끼고 싶어 종종 신라면을 끓여먹곤 하는데, 이 방법 저 방법으로 끓여봐도 그 맛은 도저히 따라할 수가 없다. 누군가 '죽기 전 먹고 싶은 음식'을 묻는다면 내 대답은 외할머니가 끓여준 그 때 그 라면일지도 모르겠다. 


토요미스테리와 라면의 궁합은 지금 생각해도 최고였는데, 그 시절에는 왜 그토록 무서운 이야기가 좋았었는지. 사실 그 때는 지금과 비교해 무서운 이야기가 훨씬 더 인기있는 콘텐츠이기도 했다. 토요 미스테리 뿐만 아니라 '이야기 속으로', '전설의 고향'과 같은 프로그램이 동시에 방영됐고, 잠들기 힘들 만큼 무더운 여름 밤이면 선풍기를 틀어놓고 가족들과 옹기종기 둘러앉아 무서운 이야기를 다룬 프로그램을 시청하곤 했다. 


외할머니는 나와 동생의 무서운 이야기를 향한 사랑을 누구보다 잘 아셨기에 우리가 방문하기 전 주에는 무조건 그 프로그램들을 녹화해두셨다. 그래서 할머니 집에만 가면 우리가 차마 보지 못하고 놓쳤던 무서운 이야기들이 녹화 테이프 속에 가득했다. 그 이야기들을 보고 또 보고, 무섭다고 꺄꺄 대면서 할머니의 사랑을 마음껏 느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외할아버지는 그런 우리의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며, 까까 사먹으라고 용돈을 주시곤 했던가.


외할아버지한테 용돈을 받으면 나와 동생은 늘 한 곳으로 향했다. 인근 만화 책방. 평소 엄마의 제재때문에 '마음껏' 만화책을 읽을 수 없었던 우리는 외갓집만 가면 산더미 만큼 만화책을 빌려왔다. 동생과 하루 종일 만화책을 읽으며 낄낄댔던 기억. 도라에몽, 괴짜가족, 삐따기, 이토준지 등등 그 시절 읽었던 만화책들은 아직도 어렴풋이 내 안에 그대로 얼룩처럼 남아있다.


되돌아보니 그 시절 행복했던 기억의 8할은 외갓집에서 탄생했다. 우리 아이들은 1년에 한 번 한국에 있는 외갓집에 갈까 말까이니,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아이들은 내가 가지고 있는, 그리하여 30대까지도 고이고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외갓집의 추억에 대해 전혀 공감해줄 수 없는 어른이 되어버릴지도. 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가 1년에 한 번 이상은 미국에 방문하실테니, 외갓집이라는 공간은 아니더라도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추억은 많은 아이로 커주었으면 한다. 



저녁밥을 먹고 엄마, 아빠, 아들 1, 2와 산책을 나선다. 엄마 아빠가 미국에 오시기 전만 해도 저녁을 먹고 산책을 가는 삶이 있으리라곤 생각 조차 못 해봤다. 주중에 남편은 늘 바빠서 야근을 하기 일쑤였고, 일에 지친 나 또한 저녁 식사 후 아이들을 목욕 시키고, 재우기에 바빴으니까. 


그런데 엄마, 아빠는 애당초 산책을 좋아하는 분들이다. 한국에서도 늘 집 앞 공원을 산책하는 엄마와 아빠는 미국에 와서도 저녁밥만 먹으면 산책을 나갔다. 하루 이틀 엄마, 아빠를 따라 아이들과 함께 산책을 나가보니 우리동네 밤 산책길이 은근 좋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미국에서는 밤에 나가면 위험해', 라고 생각해 저녁 산책을 나설 생각을 못해 봤는데, 여름철에는 오후 9시까지 해가 하늘 위에 떠있었다. 거기다 집에서 공원까지 가는 길이 15분에 불과했는데,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선선한 밤길을 걷다보면 하루에 쌓였던 피로가 싹 사라지는 듯 했다. 행복이 별거 있나. 이렇게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산책을 나서는 일 자체가 행복인 걸.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잔뜩 받으며 매일이 즐거웠던 2021년의 여름날을 우리 아이들이 꼭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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