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반인 1은 부끄럽다.
#1
요르단 처음 도착한 한 달가량은 회사에서 구해 준 임시숙소에서 머물렀다. 임시 숙소는 쇼핑몰이 즐비한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밖에 나가면 어렵지 않게 식당, 카페, 옷가게를 볼 수 있는 최적의 위치다. 아랍어도 못하는데 GPS가 종종 문제를 일으키면 주변에 있는 사람이 그 누구라도 길을 물어봐야 했다. 하루는 퇴근 후 외출을 감행했다가 길을 잃었다. 생존 아랍어와 영어를 써서 한 여성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길을 알려준 뒤 "어디에서 왔어요?"를 시작으로 "요르단에는 왜 왔어요?", "무슨 일 해요?", "온 지 얼마나 됐어요? 요르단 어때요?", "무슨 화장품 써요?" 등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길 한복판에서 20분가량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면접 때도 이렇게 많은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는 데다가, 한국에 관심이 많은 외국인을 만나리라고 생각지 못해 당황스러우면서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내가 관심 공격에 방어력이 좋지 못한 사람이라 이런 일을 두 번 겪으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요르단에 도착하자마자 행사 준비로 아주 바빴다. 행사 당일 행사 방문객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일을 하면서도 360도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어쩐지 전신이 간지러워졌다. 시선으로 간지러워지는 경험은 처음이라 나조차 '뭐야 외국 나와서 갑자기 연예인병 걸렸냐' 싶었다.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기념품을 나눠주는데 "안녕하세요!"라는 어눌한 발음의 한국어가 곳곳에서 들렸다. "한국인이에요?(Are you Korean?)"라는 질문에 소리의 근원지도 찾지 못한 채 내 일을 하며 "네.(Yes, I am)"하고 답했다. 내 주변에 있던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휴대폰 카메라를 들더니 사진 찍기를 요청한다. 연예인이라면 일하는 중에 사진 찍는 것이 일이지만, 일개 직장인이 일하는 중에 셀카를 찍는다? 뭔가 이상한 그림이다. "귀여워요, 사랑해요, 이뻐요, 안녕하세요, 사진 찍어주세요"라며 여기저기서 들어주기 곤란한 부탁이 밀려와 나도 모르게 상사를 찾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일을 하던 상사를 발견했다. 사진을 찍어달라는 귀여운 초중등생 방문객의 요청에 카메라를 보며 브이를 하고 있었던가... 아이들이 "귀여워요!"를 외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빛과 같은 속도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물품을 계속 나눠주며 나와 같이 일하는 직원 G를 눈으로 좇았다. 키가 기린처럼 큰 덕에 인파 속에서도 쉽게 보였다. 잘생겼다, 핸썸하다는 말에 기분이 좋은지 방긋 웃으며 팬들과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행사 업무에 물건 나눠주기, 인터뷰하기 뿐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좋아해 주는 방문객(이자 팬) 사진 찍어주기를 추가했다. 물건을 다 나눠준 후 사진 찍자는 요청에 처음으로 응해주었다. 셀카 모드로 된 화면을 바라보니 아무리 봐도 그냥 흔한 한국인 1이다. 휴대폰 주인은 뭐가 좋은지 환하게 웃으며 내 얼굴 옆에 바싹 붙어 손가락 하트를 만들었고, 나도 하트를 만들며 일을 이행했다. 행사가 이어지는 동안 10번 넘는 인스타그램 아이디와 사진 촬영 요청을 받았다. '대체 왜...?' 하며 의아해하면서도 좋아해 주니 고마워서 살짝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 나보다 15살 이상은 어린 학생들은 손으로 입을 막고 눈으로 귀여워하거나, "귀여워요! 예뻐요!"를 외치며 손가락 하트를 날렸다.
하하... 사랑받는 연예인 체험 재미있지만 어린 시절 외국인을 보고 좋아한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 여전히 의아함으로 고개를 갸웃.
#3
임시숙소를 나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았다. 집주인 S의 건물은 작은 슈퍼와 피자집 하나만 있는 조용한 주택가에 있다. 임시 숙소 주변에 큰 쇼핑몰 3개, 자라를 비롯한 옷가게와 과일, 채소가게, 문구점까지 있던 것과 비하면 아무것도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곳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공원. 집에서 약 10분 정도 걸어가면 인근 주민들이 모이는 공원이 하나 있다. 그냥 주택가 사이를 걷자니 좀 심심한 듯하여 회사 분과 저녁을 먹고 산책 겸 공원을 걷곤 했다.
여느 때처럼 운동복을 입고 회사 상사 J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공원을 걷고 있는데 벤치에 앉아있던 서너 명의 여학생들이 말을 걸었다. 역시나 첫 번째 질문은 "한국인이에요?"였고 그렇다고 답했다. 어쩐지 며칠 전 행사 때가 생각났다. 아니나 다를까 이 친구들 눈을 빛내며 벌떡 일어서더니 평소 좋아하는 아이돌을 만난 것처럼 한국어로 외친다. "귀여워요!", "예뻐요!", "사랑해요!" 최강 내향형인 나와 J가 받아들이기에 너무 강한 3 연타. 저녁 잘 먹고 나와서 소화시킬 겸 걷다가 갑작스러운 애정공세애 당황했지만 겨우 입꼬리를 올려 "감사합니다." 하며 자리를 뜨려 했다. 감사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드니 보이는 손가락 하트(일명 K하트). 이제는 그 친구들이 아이돌 멤버가 되어 엄청난 속도로 하트 모양을 바꾸기 시작했다. 귀여운 모양을 만들어 내면서도 시선은 우리한테 고정된 채였다. 처음 받아보는 이유 없는 애정과 귀여워하는 눈빛에 나도 회사 상사도 하트를 만들어보려 했지만 너무 부끄러워 겨우 엄지와 검지로 손가락 하트를 만들고 도망쳤다. 도망치는 와중에 뒤에서는 여전히 "귀여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가 우거진 곳에 있는 벤치에 도착했다. "와... 너무 창피했어요. 한국인이라고 좋아해 주는 건 고맙지만 이제 공원 못 올 것 같아요."라며 숨을 골랐다. J 역시 "와..." 하며 숨을 고르고 "애들 귀엽네요." 할 뿐. 애들이 소리를 지른 건 내가 아닌 키 크고 귀엽게 생긴 J 때문이지만 덕분에(?) 또 다른 체험을 했다. 국적이 한국이라는 것 하나로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고,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해주는 것이 신기했다. 요르단, 연예인 체험하기 좋은 나라잖아...?
벤치에 앉아 이제 집으로 돌아갈지, 한 바퀴 더 돌지 고민하고 있는데 반대쪽 벤치에 있는 성인 남성 두 명이 우리를 쳐다보며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주변에 사람이 많다 하더라도 귀엽지 않은 성인 남성이 말을 거는 것은 이유불문 거부한다. 이유 없는 애정 듬뿍 담긴 눈빛과 손가락하트를 해도 얄짤없다. 그대로 J의 팔을 잡고 자리를 벗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
한국에 살면서 단 한 번도 모르는 사람한테 귀엽다거나 예쁘다는 눈빛을 받아본 적 없는데 요르단에선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사람들에게 쉽게 호감을 얻었다. 국적 덕에 좋은 시선을 많이 받아 어깨에 힘이 들어갔고, 언행을 조심했다. 다른 한국인들도 요르단에서 연예인 체험해야 하니 나로 인해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는 건 안되지. 외국인이라고 식당에서 음식 서비스 주고, 디저트 가게에서도 괜히 더 먹어보라고 이것저것 주고, 친절하게 도와준 모든 분들 잊지 못할 거다. 물론 외국인이라고 돈 더 많이 받으려 한 사람도 있지만 좋은 사람들이 더 많아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