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잘쓰고 싶다. 사람들이 내가 쓰는 글에 빠져들었으면 좋겠다. 나만의 문체를 갖고 싶다.(글을 읽는 순간 아! 이거 그 작가 아니야?!하는 정도). 내 책도 내고 싶다.
평소처럼 시립 도서관 사이트에 들어가서 희망도서를 신청하고, 타 도서관에 상호대차 신청을 했다. 그러다 눈에 띈 게시글 하나.
<1일 글쓰기> 신청자 모집.
내 삶이 소중해지는 글쓰기.
이거다. 게다가 백수에게 적합한 수강료! 페에 가서 음료수 3잔 정도만 안마시면 될 정도로 저렴했다. 정원 초과될까 핸드폰으로 은행어플을 켜서 수강료부터 재빠르게 입금하고 계획표를 다운로드 해서 읽었다.
내 삶이 소중해지는 글쓰기라는 주제에 맞게 일상의 이야기를 쓸 수 있도록 짜인 목차. 수업을 진행하시는 강사님(본업은 작가님)은 책도 출간한 작가님이셨다. 아직 작가님 책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작가님께 수업을 듣는다면 내 책을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마음 한 켠에서 1cm정도 솟구쳤다. 게다가 수업은 시에서 진행되는 것이기에 글을 엮어서 책으로 출간도 해준다고 했다. 수업 시작도 전에 '프로 작가나 아마추어 작가는 아니어도 어디가서 글 써서 책 냈다는 소리는 할 수 있겠군.'하는 허세를 부렸다. 학급 문집같은 책이겠지만 작가님의 '첨삭'이 담긴 글이라면 뭐 어때! 어차피 완성만 되면 내 거잖아!
수업을 신청하고 3주 정도가 지나 첫 수업을 들으러 갔다. 설레서 새벽 3시던가 4시에 자는 바람에 늦잠을 잤다. 머리도 못 말리고 대충 가디건에 청바지를 입고서 강의실에 들어갔다.
먼저 고백부터 하겠다. 내겐 이 수업을 신청하면서 '뻔뻔한 소망들'이 있었다.
첫째는 내 또래의 이성 친구를 만나서 여러 주제에 대한 의견을 주고 받고 싶다. 두번째는 그 친구와 동네 친구가 되고 싶었다. 동네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되면 되는거고(본심). 중학교때 타지로 이사온 탓에(라고 하자)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는 이성 친구가 단 한 명도 없다. 세번째는 내 이름이 들어간 책 내는거. 어째 책을 내고 싶다는 목표가 뒤로 밀린 것 같지만, 무튼 그랬다.
솔직히 16주 동안 수업을 함께 듣고, 어느 날은 만나서 같이 글도 쓰고 하다보면 친해지고 따로 만나서 놀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비록 늦잠도 자고 머리도 산발로 한 채로 땀흘리며 들어갔지만...기대는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강의실에 들어가서 같이 수업을 들을 사람들을 (평소와 같이 아주 빠르게) 스캔을 했다. 내 또래의 남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남자는 세 명이 있었는데 어떤 분은 우리 아빠보다도 연세가 더 있어보이셨고 나머지 두 분도...아무리 젊게 보더라도 내 또래는 절대 아니었다. 친구가 입고에서 멍하게 있는 나의 표정을 마스크 너머로 꿰뚫어 봤다면 '쟤 실망했다.'는 것을 바로 알았을 것이다. 아쉽게도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친구 없이 혼자서 신청했다.
수업 시작 후 10분 정도는 강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또래도 없는데 재미있게 들을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했다. 강의 계획표를 받아서 앞으로의 수업 진행 방향과 오늘 당장 2시간 동안 배우게 될 내용을 훑어보았다. 내 소망 1번은 글렀지만 수업 내용은 흥미로웠다. 근 몇 년 동안 써본 글이라고는 자기소개서와 같이 틀에 박힌 글 뿐이라 글쓰기에 대한 열의가 더욱 더 불타올랐다. 첫 시간에 시낭송을 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근 10년 넘게 시는 안 읽었는데. 게다가 낭송? 절대 싫은데...그래도 시키니 하긴 하지만 엄청난 수압의 물이 내 열정을 잠시 식혀버린 듯했다. 2교시의 새로운 배움이 그 불씨를 다시 살렸지만.
강사님께도 말씀드렸지만 나는 수능이 끝난 뒤로 시를 읽은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시를 읽긴 했지만 유인물에 인쇄 된 시처럼 유명한 작가의 시가 아니라 (이 분이 유명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시밤 정도. 그러니 시를 낭송할 기회가 찾아올 리가 없었다. 이날 수강생 모두가 돌아가면서 시를 낭송했는데 그 별 거 아닌 것 같은 경험이 나를 하리보 젤리처럼 달콤하고 말랑한 젤리처럼 만들어버렸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읽히는 시는 꽤나 신선한 경험이었다. 특히 학교 선생님으로 정년까지 마친 듯한 남성 수강생의 낮고 중후한 목소리는 시가 아니라 시조를 읊는 느낌이었다. 시 낭송 때문에 포기하고 싶었다가, 다른 사람의 시 낭송을 듣고 열심히 하고 싶어지는 모순.
그 다음 수업은 묘사와 서사 등의 소설에 사용되는 방식을 배워서 옆 자리 사람의 외모를 묘사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코로나 시대에 사람 만날 일이 거의 없는 취준생(이라 하는 백수)은 꽤나 들떴다. 내가 생각한 것을 그대로 뱉을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나 즐겁다니.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것이 이렇게나 즐겁다니.
다음 주의 숙제까지 받고 2시간의 수업이 끝이 났다. 그리고 단톡방이 만들어졌다. 앞으로의 수업을 통해 내가 얼마나 성장할 지 두근거림은 12시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여담. 다음 주 숙제는 자기소개 글을 써오는 건데 <자기소개서>라는 글자만 인쇄된 하얀 색의 텅 빈 A4을 보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기소개...만 28년을 살아오면서도 제대로 채워내기 힘들었던 그 자기소개서. 내 장점과 단점을 나열하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려운지. 자기소개서를 첨삭까지 받고 제출했는데 면접까지 간 건 몇 번이더라... 자기소개서를 제대로 채우지 못해 졸업 후 몇 년을 백수로 보낸 나. 강사님은 그런 식으로 쓰라고 내주신 숙제가 아닌데 지난 몇 년 동안 나를 힘들게 한 자기소개서, 5음절의 이 글자는 다시금 나를 떨리게 만들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새로운 틀의 '자기소개서'를 써서 두려움을 극복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