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이릿 Aug 26. 2021

장기 취준생, 잘 살고 싶었다

하고 싶었던 것들이 뭐더라

 준비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존감은 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내 자존감은 지하까지  뚫고 들어가더니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수많은 이유 때문에 어두운 곳에 스스로 박힌 자존감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내가 손쓸 수 없는 이유 없는 우울이 나를 덮쳤다. 이 우울감은 순식간에 나빠진 것처럼 보였지만 수년에 걸쳐서 나를 좀먹고 있었다. '우울한가?'를 인지한 순간부터 더 빠르게 우울에 잠식되어 갔다. 그 뒤로는 겉으로 괜찮은 척하는 것마저 힘들어져 가족들에게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별 것 아닌 일, 나 좋으라고 하는 말에도 날을 세워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동시에 나를 하찮게 여기기 시작했다. 패기롭게 시작한 새내기 취준생은 어디로 갔는지. 내가 하는 일은 남들도 다 하는 일이고, 크게 될 수 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뾰족뾰족, 하루에도 수십 개씩 가시 돋친 혼잣말과 생각을 했다. 이런 가시들은 주변 사람들도 아프게 했지만, 가장 큰 아픔을 느끼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그런 딸을 바라보는 부모님도 마음 아팠겠지만). 나를 괴롭히기를 몇 개월. 여느 때처럼 울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끝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수많은 가시 돋친 말들은 모두 같은 동사를 포함하고 있었다. '죽고 싶다.', '죽을까.', '죽는 게 낫겠다.'


온몸에 돋아난 수 천 개의 가시는 정신적으로 나를 괴롭혔고, 정신적 스트레스 건강 악화시켰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피부 질환, 위장병, 심해진 비염. 건강까지 나빠지자 '진짜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머릿속으로 다양한 죽는 방법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고, 죽음에 다다랐을 무렵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왜 죽고 싶어 했더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죽고 싶었던 이유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불 안에서 웅크린 채 눈물 젖은 베개의 축축함을 느끼며 이유를 떠올려 보았다.


1. 취직이 되지 않아서

2. 돈이 없어서

3.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해서(하고 싶은 것은 뭐였지?)

4. 잘하는 게 없어서

5. 잘 살고 싶어서


취업 준비를 하면서 2년 이상을 힘들어했고, 급격한 우울함에 몇 개월간을 앓았는데 그 이유가 5개도 채 되지 않는다니. 우울해져서 죽음까지 상상하게 되었던 이유가 더 잘 살고 싶어서였다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참나. 머릿속에 떠오른 이유들을 하나씩 파헤쳐 보았다.


첫째, 취직이 되지 않아서 죽고 싶었다는 생각. 그만큼 열심히 했는가? 다른 애들은 학원 다니지, 인터넷 의 듣지, 스터디까지 구해서 열심히 하는데 나는 그들만큼 열심히 했나? 아닌 것 같다.

둘째, 돈이 없는 것은 일을 안 하니까 당연한 거고.

셋째, 하고 싶은 일... 당장 생각나는 것도 없는데 뭘 하고 싶었던 거지. 통역대학원에 가서 석사를 마치고 통역사가 되고 싶었던가?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던가? 코딩을 배워서 취직 잘 되고 돈 잘 번다는 공학도가 되고 싶었던가? 생활에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하고 싶었던가? 빵집을 차리고 싶었던가? 전원생활하며 유유자적 살고 싶었던가? 막연히 했던 생각만이 잔뜩 떠올랐다.

넷째, 잘하는 게 없어서. 정말 잘하는 것이 없었던가? 나 그래도 주변 사람들한테 칭찬도 꽤나 받았던 것 같은데. 아르바이트나 인턴을 하면서도 잘하는 게 있어서 뽑혔던 것 같은데... 를 너무 모질게 대하고 있는 것 같다.

다섯째, 잘 살고 싶어서. 이거다. 취직해서 돈 벌고 내 장점 살려서 취미로 하고 싶었던 것들도 하고 그렇게 잘 살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됐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많은 생각의 끝, '늦지 않았다. 지금부터 하나씩 해나가면 되지'라는 결론으로 매듭지었다. 그러자 지하로 처박혔던 자존감이 지상으로 머리를 살짝 들이밀었다. 몇 개월 만에 이부자리에서 힘차게 일어났다. 샤워를 하고 오래간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외출을 했다. 한 때 가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지던 천변의 산책길로 향했다. 때마침 천변에는 내가 좋아하는 보랏빛 꽃이 잔뜩 피어있었다. 여름날의 따스함을 담은 초록잎들이 바람에 넘실댔다. 선선 바람과 따뜻한 햇살을 온몸으로 느꼈다. 마스크를 쓰고 땀 흘리며 운동하는 사람들도 구경했다. 가라앉았던 기분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늘이 진 벤치에 앉아서 사람 구경을 하고, 자연이 주는 향기, 햇살, 바람을 느끼며 한 시간 정도 멍하니 있다 집으로 돌아왔다.


책상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 하고 싶었던 것들, 하고 싶었는데 핑계를 대면서 시작하지 않은 것들을 하나하나 적어 내려갔다. 어렵지 게 수십 개의 문장을 완성할 수 있었다. 

 

우울에 잠식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를 위한 처방전도 필요했다. 일상의 즐거움을 찾기.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 함께 기록하기로 했다.


또 생각만 하고 끝낼 수 없다. 당장 행동으로 옮겨야 했다. 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인 글쓰기 수업 듣기. 언젠가 해야지, 하면서 미뤘는데 집 앞 도서관에서 작가와 함께하는 글쓰기 수업 프로그램이 있었다. 곧바로 신청했다, 늦지 않게 수업료도 이체했. 16주간의 글쓰기 수업을 통해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바뀔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 수업을 신청하고 새로운 만남과 배울 것을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설레 4월이었다.


행복: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