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준비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존감은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내 자존감은 지하까지 쭉 뚫고 들어가더니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수많은 이유 때문에 어두운 곳에 스스로 박힌 자존감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내가 손쓸 수 없는 이유 없는 우울감이 나를 덮쳤다. 이 우울감은 순식간에 나빠진 것처럼 보였지만 수년에 걸쳐서 나를 좀먹고 있었다. '우울한가?'를 인지한 순간부터 더 빠르게 우울에 잠식되어 갔다. 그 뒤로는 겉으로 괜찮은 척하는 것마저 힘들어져 가족들에게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별 것 아닌 일, 나 좋으라고 하는 말에도 날을 세워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동시에 나를 하찮게 여기기 시작했다. 패기롭게 시작한 새내기 취준생은 어디로 갔는지. 내가 하는 일은 남들도 다 하는 일이고, 크게 될 수 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뾰족뾰족, 하루에도 수십 개씩 가시 돋친 혼잣말과 생각을 했다. 이런 가시들은 주변 사람들도 아프게 했지만, 가장 큰 아픔을 느끼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그런 딸을 바라보는 부모님도 마음도아팠겠지만).나를 괴롭히기를 몇 개월. 여느 때처럼 울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끝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수많은 가시 돋친 말들은 모두 같은 동사를 포함하고 있었다. '죽고 싶다.', '죽을까.', '죽는 게 낫겠다.'
온몸에 돋아난 수 천 개의 가시는 정신적으로 나를 괴롭혔고, 정신적 스트레스는 건강을악화시켰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피부 질환, 위장병, 심해진 비염. 건강까지 나빠지자 '진짜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머릿속으로 다양한 죽는 방법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고, 죽음에 다다랐을 무렵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왜 죽고 싶어 했더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죽고 싶었던이유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불 안에서 웅크린 채 눈물 젖은 베개의 축축함을 느끼며 이유를 떠올려 보았다.
1. 취직이 되지 않아서
2. 돈이 없어서
3.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해서(하고 싶은 것은 뭐였지?)
4. 잘하는 게 없어서
5. 잘 살고 싶어서
취업 준비를 하면서 2년 이상을 힘들어했고, 급격한 우울함에 몇 개월간을 앓았는데 그 이유가 5개도 채 되지 않는다니.우울해져서 죽음까지 상상하게 되었던 이유가 더 잘 살고 싶어서였다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참나. 머릿속에 떠오른 이유들을 하나씩 파헤쳐 보았다.
첫째, 취직이 되지 않아서 죽고 싶었다는 생각. 그만큼 열심히 했는가? 다른 애들은 학원 다니지, 인터넷 강의 듣지, 스터디까지 구해서 열심히 하는데 나는 그들만큼 열심히 했나? 아닌 것 같다.
둘째, 돈이 없는 것은 일을 안 하니까 당연한 거고.
셋째, 하고 싶은 일... 당장 생각나는 것도 없는데 뭘 하고 싶었던 거지. 통역대학원에 가서 석사를 마치고 통역사가 되고 싶었던가?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던가? 코딩을 배워서 취직 잘 되고 돈 잘 번다는 공학도가 되고 싶었던가? 생활에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하고 싶었던가? 빵집을 차리고 싶었던가? 전원생활하며 유유자적 살고 싶었던가? 막연히 했던 생각만이 잔뜩 떠올랐다.
넷째, 잘하는 게 없어서. 정말 잘하는 것이 없었던가? 나 그래도 주변 사람들한테 칭찬도 꽤나 받았던 것 같은데. 아르바이트나 인턴을 하면서도 잘하는 게 있어서 뽑혔던 것 같은데... 나를 너무 모질게 대하고 있는 것 같다.
다섯째, 잘 살고 싶어서. 이거다. 취직해서 돈 벌고 내 장점 살려서 취미로 하고 싶었던 것들도 하고 그렇게 잘 살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됐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많은 생각의 끝,'늦지 않았다. 지금부터 하나씩 해나가면 되지'라는 결론으로 매듭지었다. 그러자 지하로 처박혔던 자존감이 지상으로 머리를 살짝 들이밀었다. 몇 개월 만에 이부자리에서 힘차게 일어났다. 샤워를 하고 오래간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외출을 했다. 한 때는 가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지던 천변의 산책길로 향했다. 때마침 천변에는 내가 좋아하는 보랏빛 꽃이 잔뜩 피어있었다. 여름날의 따스함을 담은 초록잎들이 바람에 넘실댔다. 선선한 바람과 따뜻한 햇살을 온몸으로 느꼈다. 마스크를 쓰고 땀 흘리며 운동하는 사람들도 구경했다. 가라앉았던 기분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늘이 진 벤치에 앉아서 사람 구경을 하고, 자연이 주는 향기, 햇살, 바람을 느끼며 한 시간 정도 멍하니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책상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 하고 싶었던 것들, 하고 싶었는데 핑계를 대면서 시작하지 않은 것들을 하나하나 적어 내려갔다. 어렵지 않게 수십 개의 문장을 완성할 수 있었다.
언제 우울에 잠식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를위한 처방전도 필요했다. 일상의 즐거움을 찾기.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 함께 기록하기로 했다.
또 생각만 하고 끝낼 수 없다. 당장 행동으로 옮겨야 했다. 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인 글쓰기 수업 듣기. 언젠가 해야지, 하면서 미뤘는데 집 앞 도서관에서 작가와 함께하는 글쓰기 수업 프로그램이 있었다. 곧바로 신청했다, 늦지 않게 수업료도 이체했다. 16주간의 글쓰기 수업을 통해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바뀔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 수업을 신청하고새로운 만남과 배울 것을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4월이었다.
행복: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출처: 네이버 국어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