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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윤 Aug 05. 2016

익숙함

익숙함이 곧 아픈 것이기도 하다

4년 가까이 사귀었던 그와의 많고도 많던 기념일 중 어느 날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로맨틱한 서프라이즈를 즐길만한 시간은 훌쩍 지나고 났을 즈음이었다. 돈을 반반 씩 내고 족욕기보다 더 큰, 무릎 바로 밑까지 다리를 담글 수 있는 각탕기라는 것을 샀다. 절대 우리 집에 머물 것이었고 주로 내가 쓸 것이므로 그가 내게 준 선물이라 봐도 좋다.


실상 각탕기라는 것이 시간을 재 주고 물거품이 나는 것이 전부인 큰 대야 같은 것이다. 뜨거운 물을 붓고 다시 그 물을 빼는 것은 온전히 사람의 몫이다. 문제는 당시 살던 집의 화장실이 방 바닥보다 20cm 남짓 높은 위치에 올라가 있어서, 각탕기에 물을 가득 담고 화장실 턱을 넘나드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물을 가득 채우면 20kg는 족히 될 듯한 그것을 여자애 혼자 옮겨 다니면서 물을 넣고 빼고 하려니 각탕기가 자빠지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물을 뺄 때 쓰는 호수의 잠금장치를 연 채로 물을 받았을 땐 그냥 방 한가운데에 호수를 연결해 틀어놓은 꼴이었다. 한번은 화장실 턱 위로 끙끙대며 다 쓰고난 물이 가득한 각탕기를 올려놓다가 그만 그것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며 물이 폭포처럼 촤아, 방바닥에 쏟아졌다. 정말이지 방 한 가운데서 들리는 그 파도의 절망적인 소리는 앞으로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아이 하나가 들어갈 만한 통의 물을 그대로 다 쏟고서는 울면서 구남친에게 전화했던 기억이 난다. 수건 몇 개를 동원해 적시고 짜내고를 백번 반복하고보니 어찌어찌 그게 다 닦아지긴 하더라.


화딱지가 나서 각탕기 자체를 갖다 버리고 싶을 만도 한데, 방바닥을 백번 닦은 그 수고로움이 아까워서 이를 악물고 쓰고 또 썼다. 그동안 쌓은 실수들로 배운 게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이제 턱이 높지 않은 집에 살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각탕기 하나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꽤 길었다. 어떤 물건은 익숙해지는 데 노력이 별로 들지 않고, 또 어떤 것은 익숙해지기 전에 포기하고 마는 것도 있다. 시간과 노력이 길었다고 내 마음이 더 유별나냐, 하면 또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사람도 그렇고, 장소도 그렇다. 나는 익숙해졌다 싶을 때쯤 막상 고장이 나는 물건도, 마음이 변해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는 마음이 많이 아쉬울 것이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 항상 마음을 제일 아프게 하기 마련이다. 익숙함은 좋지만, 그만큼 아픈 것이기도 한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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